서울에도 봄이 왔다. 큰맘 먹고 교외로 떠나는 것이 즐거운 봄맞이가 될 수 있겠지만, 적당히 여유를 부려 서울을 한 바퀴 도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그물에 걸린 멸치 떼만큼 많은 일들을 잠시 잊기로 하고 한강을 건넜다. 사실 자연환경과 전통유산을 찾아 멀리 나가는 것만이 여행은 아니다. 마치 파리의 마레 지구를 걷듯 도시인들의 일상 속으로 들어가 보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 될 수 있다.
여행에서는 장소가 중요하다기보다 그 장소에 어떤 마음으로 섰느냐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닌 서울에는 의외로 보석 같은 장소들이 많이 존재한다.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건물들도 그런 곳들이다.
개인적으로는 그중에서 종묘를 최고로 생각한다. 종묘의 정전은 비단 서울에서뿐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가장 멋진 건물이다. 옛 문화유산이어서가 아니다. 잘 알려졌다시피 정전은 긴 건물이고, 그 길이는 조선의 역사와 함께 차츰 옆으로 칸을 늘려간 결과다. 기다란 형태 자체가 한 왕조의 기억을 대변하는 셈이다. 시간을 형태로 환원한 정전의 건축은 앞으로도 쉽사리 보기 힘든 우리 건축의 걸작임에 틀림없다.
최근에 종묘 관람은 창덕궁과 마찬가지로 예약제에 의해 인솔자를 따라다니는 방식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제 더 이상 평일의 한가한 시간에 정전 앞마당에서 햇볕을 쬐며 편안하게 앉아있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세계문화유산을 보존하려는 정책이라 생각하고 아쉬움을 애써 감췄다.
기왕 평일 하루를 서울에 투자한다면 광화문에서 커피 한 잔을 하는 것이 좋다. 딱히 별다를 것 없는 거리의 풍경이지만, 광화문 사거리 일대는 왕조의 중심이었던 과거의 내공을 여전히 지니고 있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곳에 가면 '어쩐지 기분이 좋은' 것이다.
특히 많은 관공서와 유수의 기업들이 모여 있는 장소답게 평일 낮의 광화문 거리에는 분주함이 흐른다.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를 홀로 여행객이 되어 걷고 있자면 괜히 즐겁고 뿌듯하다. 딱히 책을 살 게 아니라도 광화문 일대에 모여 있는 서점 중 한 군데에 꼭 한 번 들른다. 그곳에서 나와 비슷한 처지의 아름다운 여인이 홀로 책을 들춰보고 있다면,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여행의 즐거움은 배가 된다.
광화문에서 다음 목적지를 고르는 것은 약간의 고민을 동반한다. 삼청동으로 갈까, 효자동을 지나 부암동으로 갈까, 아니면 정동으로 갈까.
매번 다른 결정을 하고는 하지만, 봄에는 정동이 가장 어울린다. 이유는 단순하다. 이문세가 5월의 정동을 노래했기 때문이다. 덕수궁 돌담을 따라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을 시샘하듯 바라보며, 그래도 정동의 꽃향기를 가슴에 새겨야만 계절들을 보내고 또다시 찾아올 겨울을 편안히 넘길 수 있는 것이다.
덕수궁으로 찾아가도 좋겠지만 아까 종묘를 다녀왔으니, 서울시립미술관으로 향한다.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옛 대법원 건물이다. 건축을 하는 입장에서 서울이라는 도시에 대해 가장 아쉬운 점 하나는 식민지 시대에 일제에 의해 지어진 건물들이 일방적인 논리로 많이 사라져버렸다는 점이다. 물론 치욕의 역사임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만, 그 시대의 흔적을 지우는 것이 우리의 자존심을 세우는 최선의 방법일지는 다시 생각해볼 만한 일이다. 만약 우리에게 모든 과거를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의 주역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만 있다면, 치욕적인 건축도 우리가 거쳐 왔던 흔적으로서 당당히 내보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땐 그랬지만, 이젠 이 정도야'라고 툭 내뱉는 쿨한 대한민국이었으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
여하튼 서울시립미술관 역시 일본에 의해 지어진 건축이지만, 그 모습은 무척이나 정갈하며 아름답다. 미술관으로 개조를 하며 외부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새로 지었는데, 옛 건물 속에서 만나는 새로운 공간들의 경험이 재미있다. 미술관의 앞뜰에 만발한 꽃들의 향연은 덤으로 얻는 선물이다.
광화문 일대를 돌아다니다 마지막으로 꼭 가는 장소가 한군데 있다. 바로 흥국생명 빌딩 지하 2층에 위치한 'ZZA'라는 카페 겸 바(bar)다. 화장실 바로 옆에 작게 위치한 곳인데, 그곳에 있으면 잠시 이탈리아의 어느 세련된 카페, 혹은 뉴욕의 어느 작은 바에 온 느낌이 든다. 어찌 보면 역사적인 장소와는 어울리지 않으나, 이런 시공간을 초월하는 경험도 나쁘지 않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서울은 전통과 현대가 잘 어우러져 있다고 하기엔 아직 조금 부족한, 뭔가 잘 화합이 안 된 혼합물의 도시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이런 뒤섞임이 서울의 매력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차피 21세기의 서울은 혼란스러운 세상이다. 삶이 그러할진대 도시가 너무 정갈하면 오히려 어울리지 않는다. 600년 전의 종묘와 100년 전의 시립미술관, 30년이 넘은 대형서점과 조금은 미래적인 이미지의 카페가 한 군데에 모여 있는 광화문은 그 자체로 복잡한 역사의 단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뒤섞임 속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관조하는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서울 여행의 핵심이다. 나는 서울의 이런 모습이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