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때문에 제자들에게 돈 걷는 일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네."
지난해 8월 중앙대 미대 서양화과.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스승의 말에 정년퇴임기념전 계획을 의논하러 간 제자들은 말문이 막혔다. 미대 교수의 정년퇴임기념전은 으레 제자들이 비용을 갹출해 스승에게 헌정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전시회장 대관료와 전시회 브로슈어 제작비, 스승의 작품 화집 비용, 개막식 뒤풀이 비용까지 합치면 몇천만원이 든다. 제자들 앞에서 스승은 말을 이었다. "나도 퇴임하면서 제자들에게 선물을 주고 싶네. 전시회를 하되 비용은 내가 부담하겠네."
'바람결'의 작가 안병석(65) 중앙대 미대 서양화과 교수가 20~26일 서울 인사아트센터에서 정년퇴임기념전을 연다. 1층에는 안 교수 작품이, 2~3층에는 제자 200여명의 작품 한 점씩이 걸린다. 스승과 제자의 작품전이 함께 열리는 셈이다. 대관료 2400만원은 안 교수가 부담했다. 수익금의 절반이 창작지원금으로 학과에 기부된다. 브로슈어 제작비와 뒤풀이 비용은 스승을 겨우 설득해 제자들이 5만원씩 내서 충당한다.
서울 명일동 작업실에서 기자와 만난 안 교수는 "화가는 교수직에서 물러나도 여전히 현역이다. 정년이라고 제자들에게 대우받기보다는 함께 그림 잔치를 열고 싶었다"고 말했다.
중앙대 미대의 전신인 서라벌예대 서양화과 64학번인 안 교수는 1981년 '바람결'로 카뉴 국제회화제 금상을 받으면서 명성을 얻었다. 이후 안 교수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바람결' 연작은 바람에 따라 움직이는 풀의 동세(動勢)를 표현한 그림. 안 교수는 "초기엔 선묘 중심의 개념적인 작품이었는데 사람들이 그 안에서 보리밭 등의 구체적 형상을 찾아내며 구상에 가까워졌다"고 했다.
이번 전시회에서 안 교수는 여름날 푸른 털쇠보리가 바람에 눕는 장면을 담은 '바람결-강변에서', 가을바람에 일렁이는 갈대밭을 그린 '바람결-갈대' 등 '바람결' 연작 25점을 선보인다. 이 중 캔버스 여러 개를 이어붙여 자연의 울림을 극대화한 파노라마 작품이 4세트다. 가로 10m가 넘어서 다른 전시회에서는 전체를 다 보여줄 수 없었던 그림들이다.
6·25전쟁으로 아버지를 잃은 안 교수는 대학 4학년 때인 1968년 맹호부대 소속으로 월남전에 참전했다. 그 월급으로 대학과 대학원(홍익대) 등록금을 충당했다. 중·고교 미술 교사를 하면서 밥벌이를 했고 1988년 중앙대 교수로 임용됐다. 그는 자신을 "선택받은 사람"이라고 했다. "월남전에서도 살아 돌아왔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밥벌이를 하니까요." 청각 장애인인 장남 준홍(30)씨도 대구대 미대를 졸업하고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그의 아들도 독립적이긴 마찬가지다. "아들이 '아버지가 누구다'라는 이야기를 듣는 걸 가장 싫어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