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살기. 풀어쓰면 '상대를 반드시 죽이는 기술'이란 섬짓한 용어다.
상대가 있는 스포츠는 전쟁과 같다. 승부에서 이겨야 산다. 패배는 곧 죽음이다.
'최고 투수'라 불리기 위해서는 필살기가 있어야 한다. 실제 각 팀 에이스들에게는 모두 비장의 무기가 있다. 에이스급 투수들이 던지는 필살기. 2011 시즌 개막에 앞서 에이스들의 손끝에서 펼쳐질 화려한 마법의 세계를 살펴보자.
▶류현진표 서클 체인지업 vs 김광현표 슬라이더
한화 류현진 하면 떠오르는 구종은 서클 체인지업이다. 기존 체인지업 그립에서 엄지와 검지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쥐고 던진다고 해서 '서클(원)'이란 수식어가 붙었다. 체인지업이란 변화구의 가장 큰 특징은 속도를 늦춘 '오프 스피드'에 있다. 직구와의 속도 차를 통해 타이밍을 빼앗는 구종이다. 따라서 체인지업이 효과적이려면 직구를 던질 때와 투구 폼이 똑같아야 한다. 류현진의 가장 큰 장점은 투구폼이 일정하다는 점. 타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류현진의 폼으로 구종을 구분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은다. 류현진 표 서클 체인지업은 오른손 타자 바깥쪽에 걸치며 살짝 떨어진다.
류현진과 최고 좌완을 다투는 SK 김광현는 슬라이더를 잘 던진다. 보통 슬라이더보다 5km쯤 빠른 고속 슬라이더다. 기본적으로 슬라이더는 좌-우의 횡으로 변하는 구질이다. 하지만 상-하의 종으로도 어느 정도 떨어진다. 김광현 슬라이더는 바로 이 상-하 낙폭이 크다. 특히 타점이 낮아 타자의 헛스윙을 유도한다.
▶봉중근의 너클 커브
LG 봉중근은 커브의 달인이다. 불같은 강속구 투수가 아니어도 LG 에이스로 확고한 자리매김을 한 비장의 무기, 바로 너클 커브였다. 봉중근의 필살기, 너클 커브는 말 그대로 '커브+너클볼'의 합성어다. 사실 두 구종은 정반대의 성질을 지녔다. 냉탕과 온탕이다. 커브가 회전을 극대화해 위에서 아래로 떨어뜨리는 구질이라면, 너클볼은 일명 '무회전 볼'로 공기 저항에 따라 예측할 수 없는 흔들림을 일으키는 마구다. 미국 출신인 원년 스타 박철순이 선보여 파란을 일으켰던 바로 그 공. 최근에는 보스턴 팀 웨이크필드의 주무기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구질이다. 그렇다면 대체 어울리지 않을 법한 너클 커브의 정체는 무엇일까. 너클 커브는 커브와 검지 그립이 다르다. 검지를 너클볼을 던지듯 접어서 쥔다. 세 손가락(혹은 두손가락)을 접어쥐는 너클볼과 다르다.
이론적으로 너클 커브는 커브와 너클볼의 장점을 극대화한 구질이다. 공은 회전이 많이 걸릴수록 비거리가 늘어난다. 제대로 브레이크를 먹지 않은 밋밋한 행인커브가 가장 홈런을 허용할 위험이 큰 이유다. 하지만 무회전의 너클볼은 상대적으로 비행거리가 짧아진다. 결국 너클 커브는 장타 위험이 있는 커브의 단점을 최소화하기 위한 목적에서 탄생한 구질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 필드에서 선수들은 "너클 커브는 커브와 큰 차이가 없다. 그저 너클 커브 그립이 편한 선수들이 던지는 것 뿐"이라고 증언한다. 실제 비거리 효과는 정확하게 검증된 바가 아직 없다.
▶윤석민의 변형 포크볼, 송승준의 스플리터
KIA 에이스 윤석민은 슬라이더, 커브, 컷 패스트볼 등 거의 모든 구종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딱 하나 안 던진 공이 바로 포크볼이다. 지난해부터 익힌 새 구종. 최고의 볼 터치 감각을 자랑하는 그는 이미 포크볼을 자신의 공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변형 포크볼을 익혔다. 검지와 약지를 벌리고 중지를 세우는 독특한 그립이다.
롯데 에이스 송승준은 스플리터의 달인이다. 각도도 크고 예리해 삼진을 잡는 결정구로 많이 사용한다. 포크볼과 스플리터는 형제지간이다. 검지와 중지를 많이 벌리면 포크볼, 적게 벌리면 일명 SF(Split Fingered Fastball)볼이라 불리는 스플리터다. 쉽게 말해 포크로 찍듯 손가락을 쭉 벌려 찍어잡으면 포크볼, 살짝 벌려 잡으면 스플리터인 셈이다.
포크볼과 스플리터의 강점은 직구 궤적과 똑같다는데 있다. 손가락을 벌렸을 뿐 직구와 똑같은 팔 스윙으로 던지기 때문이다. 포크볼은 스피드는 느리지만 각도가 크다. 스플리터는 포크볼보다 빠른 대신 떨어지는 각도가 작다.
미세한 차이에도 불구, 두 구종은 타자가 볼 때 직구처럼 출발하다 쑥 가라앉기 때문에 헛스윙 유도율이 높다. 그만큼 강속구가 동반될 때 유인구로서의 위력을 발휘하는 공이다. 직구 구속이 떨어질 수록 포크볼과 스플리터의 위력은 반감된다. 메이저리그만 봐도 로저 클레멘스와 커트 실링 등 강속구 투수들이 스플리터를 효과적 무기로 사용했다.
포크볼은 '악마와의 계약'이라 불릴 만큼 팔꿈치 부상 위험이 크다. 손에서 쑥 빠져나가기 때문에 허공에다 대고 빈 팔 스윙을 하는 것과 똑같기 때문이다. 이 구종은 일본 선수들의 전유물이다. 노모 히데오, 사사키 가즈히로 등 일본 투수들이 포크볼로 메이저리그를 평정할 수 있었던 이유다. 한국에서도 왕년의 롯데 에이스 조정훈이 각도 큰 포크볼을 잘 던졌지만 부상의 덫을 피하지 못했다.
▶김선우의 컷 패스트볼
두산 에이스 김선우는 커터(cutter)라 불리는 컷 패스트볼을 잘 던진다. 빠른 직구의 궤도가 수평에 가까운 단점을 스피드와 각도에 있어 미세한 차이를 보이는 커터로 극복했다.
컷 패스트볼은 직구라 불리는 포심 패스트볼과 슬라이더의 딱 중간 구질이다. 직구처럼 오다 타자 바깥쪽으로 휘어져 들어가는데 스피드나 꺾어지는 각도가 딱 직구와 슬라이더의 중간 수준이다. 그래서 직구가 빠르고 슬라이더를 잘 던질수록 더 큰 위력을 발휘한다. 타자가 직구에 포커스를 둘수도 없고 슬라이더에 둘 수도 없게 만드는 애매한 스피드와 각도의 공이기 때문이다. 검지와 중지를 활용하는 커터는 던지는 순간 중지를 꾹 눌러 타자 앞에서의 변화를 유도한다.
넥센 에이스 금민철은 내추럴 커터로 유명하다. 의도적이지 않아도 독특한 투구폼으로 인해 모든 직구가 커터처럼 자연스럽게 휘어져 들어간다. KIA 양현종도 넥센 김시진 감독에게 배운 커터를 올시즌부터 활용할 예정.
메이저리그에서는 '수호신' 마리아노 리베라가 엄청나게 빠른 컷 패스트볼로 최고 마무리 투수로 명성을 날렸다. 정현석 기자 hschung@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