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영화는 빠른 호흡으로 달려가고, 어떤 영화는 느릿하게 기어간다. 인도의 카란 조하르 감독이 인도와 미국을 가로지르며 제법 큰 스케일로 만든 '내 이름은 칸'은 이 두 개의 흐름 사이에 있는 영화다.

9·11 테러는 세상의 가치관을 어떻게 바꿔놓았을까. 아스퍼거증후군(자폐증)을 앓고 있는 한 남자(샤룩 칸)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는 이 질문의 답을 치열하게 찾아간다. 미국 공항 검색대에서 줄을 서 있던 칸은 이슬람교도라는 이유만으로 치밀한 조사를 받는다. 결백이 증명된 순간 공항 직원이 묻는다. "당신은 왜 워싱턴에 가려 하나요?" 칸의 대답은 황당하다. "대통령을 만나야 해요. 그를 만나 '나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다'고 말할 거예요." 영화는 칸의 황당한 계획이 실현되기까지 그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가슴 벅찬 이야기를 들려준다.

오래전 칸의 엄마는 아스퍼거증후군을 앓고 있는 아들에게 수많은 삶의 지혜를 가르쳐주었다. 기술을 전해주고, 영어를 가르치고, 무엇보다 옳고 그름의 차이를 명확하게 이야기해주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존재한단다. 좋은 행동을 하는 좋은 사람과 나쁜 행동을 하는 나쁜 사람. 좋은데 나쁜 행동을 하는 사람은 결코 없다. 그건 그냥 나쁜 사람일 뿐이지."

아이는 엄마의 뜻에 따라 좋은 행동을 하는 좋은 사람으로 성장한다. 동생이 있는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미용제품 세일즈맨이 되고, 힌두교를 믿는 아름다운 여인 만디라(까졸)와 종교의 벽을 넘어 사랑의 결실을 맺는다. 자폐증을 앓는 남자가 행운의 깃털을 거머쥐고 세상을 부유(浮遊)한다는 점에서 영화는 '인도의 포레스트 검프'로 불릴 만하다.

닮은꼴 영화를 통해 짐작할 수 있듯 영화 전체에 넘쳐흐르는 것은 인간애에 관한 예찬. 칸은 포레스트 검프와 마찬가지로 휴머니즘의 가치를 웅변하고 정의의 힘을 순수하게 믿는다. 인도 영화 특유의 춤과 노래가 칸의 가슴에서 자라고 있는 휴머니즘을 부각시킨다.

다만 칸의 휴머니즘은 안타깝게도 유통기한이 정해져 있는 상황. 세상은 좋은 행동만 하는 칸을 언제부턴가 결코 좋은 사람으로 봐주지 않는다. 비극은 9·11 테러에서 비롯된다. 9·11 이전의 칸은 누구보다 쉽게 행복을 거머쥐었지만 9·11 이후의 그는 모든 것을 매몰차게 빼앗겼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가족이라는 이름의 모든 것. 황당해보였던 칸의 계획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하는 건 바로 이 지점부터다.

영화는 중학교 교과서 수준의 친절한 해설로 9·11 테러사건이 우리에게 남긴 고통의 자국을 쓸어 담는다. '인도의 톰 크루즈' 샤룩 칸과 여배우 까졸의 연기는 다소 빡빡하게 직조된 영화의 흐름을 느슨하게 풀어주는, 여백 사이로 흐르는 맑은 공기 같다.

직설적인 표현이 난무하고 감정이 과도하게 가열되지만 영화의 품격을 운운하며 토를 달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칸 엄마의 논리에 빗대어 말하면 세상에는 좋은 의도를 가진 좋은 영화와 나쁜 의도를 가진 나쁜 영화가 있을 뿐이다. '내 이름은 칸'은 이슬람에 대한 사소한 편견이 불러일으킨 공포의 현장을 깊이 있게 파고드는, 참 좋은 의도의 영화다. 12세 이상 관람가. 24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