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오전 11시쯤 경기도 평택시의 한 돼지농장. 돈사(豚舍) 4개가 다닥다닥 붙은 농장에서 꽥꽥 돼지 울음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돈사 2개는 텅 비어 있었다. 원래 이곳에 있던 돼지 550여 마리가 구제역에 걸려 얼마 전 살(殺)처분돼 농장 마당 한쪽에 판 매몰지에 묻힌 것이다. 이 농장에 구제역이 찾아온 것은 지난달 28일. 그전에 백신 접종을 한 덕에 절반가량만 살처분됐다. 이 농장의 모습은 처참했다. 그곳에선 방역 규칙도 환경규칙도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방역 당국과 농가들이 구제역에 참패할 수밖에 없었던 모든 요인을 이 농장에서 한눈에 볼 수 있었다.
구제역이 발생한 돈사에서 불과 5m 떨어진 마당에 돼지 사체 3마리가 땅바닥에 널브러져 방치돼 있었다. 농장 주인 A(65)씨는 "몸이 약해 죽은 돼지들을 지난 16일과 17일 돈사에서 빼낸 뒤 혹시 구제역 증상이 나타날지 몰라 마당에 그대로 두고 살폈지만 구제역 증상은 나타나지 않았다"고 했다.
구제역이 발생한 농장에서 돼지가 죽으면 사인(死因)에 관계없이 지자체에 즉각 신고하거나, 임시 매몰하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 하지만 A씨는 돼지 사체를 2~3일이나 농장 마당에 그대로 버려둔 것이다. 야생동물들이 돼지 사체를 먹고 이리저리 돌아다녔다면 지금 어디선가 각종 전염병이 번지고 있을 어이없는 광경이었다.
18일 이 농장에선 더 위험하고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농장 주인은 돼지 사체를 트랙터에 담아 돈사 바로 옆에 만든 구덩이(깊이 약 6m)에 밀어넣었다. 지하수가 흥건히 고여 있던 구덩이에서 '첨벙' 소리가 들렸다. 이어 A씨는 돼지 사체 위에 석회가루를 뿌렸다. 그는 "혹시 죽은 돼지들에게 구제역 바이러스가 있더라도 석회가루를 뿌렸으니 괜찮을 것"이라고 했다. 이 농장에는 산 돼지, 바닥에 방치된 죽은 돼지, 구제역에 걸려 구덩이에 던져진 돼지가 함께 있었던 셈이다.
전문가들은 "상상도 못할 일"이라고 말한다. 서울대 수의학과 유한상(50) 교수는 "설령 그 돼지가 구제역에 걸리지 않았더라도 농장 곳곳에 있을지 모르는 구제역 바이러스가 돼지 사체 안으로 침투했을 수도 있고 앞으로 침투할 수도 있다"며 "죽은 돼지가 지하수를 오염시킬 수밖에 없으므로 빨리 빼내야 한다"고 말했다. 150여명이 사는 이 마을엔 아직 상수도가 들어오지 않아 주민들은 식수와 각종 생활용수로 지하수를 사용하고 있다.
건국대 수의과대학 이중복(51) 교수는 "죽은 돼지를 이틀 넘게 방치한 것은 가축전염병예방법에 어긋나는 일"이라며 "바이러스는 물론 각종 세균성 전염병을 유발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위험천만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평택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평택시청 관계자는 "지금까지 (평택시내) 50여개 돼지농장에서 200회가 넘는 살처분이 진행돼 그 농장에 현장 점검을 나갈 시간이 없다"며 "앞으로 조사를 하겠지만 (A씨의 행동이) 크게 문제 되는 일인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