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오전 9시 2분쯤 서울경찰청 112신고센터에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백화점 10층의 개인 물류창고에 폭발물로 의심되는 상자 2개가 있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곧바로 서울 영등포경찰서 경찰관 20여명이 여의도백화점으로 출동해 9~13층에 있던 20여명을 대피시켰다. 오전 10시 40분쯤에는 경찰특공대 폭발물처리반이 현장에 도착했다. 515㎡(약 156평) 넓이 물류창고에는 사과상자 3분의 2 남짓한 크기(가로 36㎝×세로 30㎝×높이 25㎝)의 우체국 택배용 상자 2개가 놓여 있었다. 상자 위에는 '경기 군포', '2008년 1월~12월'이라고 적혀 있었다.

특공대원들이 상자를 조심스레 열자 상자 안에는 1만원권 다발이 쌓여 있었다. 1만원권 100장을 하나로 묶고 다시 10묶음을 하나로 묶은 1000만원 '돈다발'이 20개나 됐다. 나머지 상자에는 5만원권 100장 묶음을 5개씩 묶은 2500만원짜리 돈다발이 32개 있었다. 상자 두 개에 든 현금이 10억원이었다.

이날 경찰에 신고한 개인 물류창고 지점장 양모(45)씨는 "물류창고가 경기도 여주로 이사 가기 때문에 한 달 전부터 상자를 맡긴 사람에게 전화와 문자로 연락했는데, 연락이 안 되는데다 상자가 꽤 무거워 위험한 물건일 수도 있어 경찰에 신고했다"고 말했다.

경찰은 상자를 맡긴 사람을 찾아 나섰지만, 결국 상자 주인을 찾지 못했다. 물류창고 업체 관계자에 따르면 지난해 8월 25일 상자를 맡긴 사람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그는 보관 계약서에 이름을 '강○○'라고 적고 주민등록번호와 휴대전화 번호 두 개를 남겼다. 이 남자는 1년치 보관료 201만 9600원을 현금으로 냈다. 그러나 경찰이 조사했더니 이 남자가 쓴 주민등록번호는 존재하지 않는 번호였고, 휴대전화 중 하나는 사용정지, 나머지 하나는 꺼진 상태였다. 경찰은 통신사에 휴대전화 사용자를 확인해달라고 요청했다.

미술품이나 귀중품, 중요 서류나 가보(家寶) 등을 대신 보관해주는 이 창고에는 물건을 보관할 수 있는 3㎡(약 1평)짜리 방 15개와 캐비넷 90개가 있다. 물건을 맡긴 사람들은 지문을 인식해야 창고에 들어갈 수 있고, 각자 방이나 캐비넷 열쇠를 별도로 갖고 있다.

이 업체는 보관 약정이 된 8월 24일까지는 이 돈을 은행에 맡기기로 했다. 업체 약관은 계약 기간이 끝나고 3개월이 지나도 물건을 찾아가지 않으면 폐기 처분하게 돼 있다. 경찰은 "주인이 돈을 찾아가지 않을 경우 폐기처분할지 여부는 경찰 소관사항이 아니다"며 "계약관계가 남아 있어 기다려봐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지금까지 검찰이나 경찰 수사 과정에서 개인이나 기업 비자금으로 쓰인 거액의 현금다발이 나온 적은 있었지만, 이번처럼 돈의 주인을 알 수 없는 경우는 드물었다. 한화그룹 비자금 의혹을 수사하던 서울서부지검은 지난달 말 한화그룹 장교동 본사를 압수수색하면서 사무실 금고에서 5만원권 15만여장과 1만원권 등 현금 79억원을 찾아냈다. 2007년 신정아씨 학력위조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도 검찰은 성곡미술관 3층 박문순 관장 집을 압수수색하면서 현금과 수표 60여 억원을 발견했다.

경찰 관계자는 "아직 상자를 맡긴 사람의 신원이나 돈의 출처는 알 수 없지만, 가짜 주민등록번호를 쓰며 물품보관소에 현금 10억원을 맡긴 것은 수상하다"며 "범죄에 쓰인 돈이거나 기업 비자금(秘資金)처럼 부정한 용도에 쓰인 돈일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