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이끼'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의 서늘한 눈빛을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글러브'에서 시종일관 밝은 얼굴로 영화에 활기를 불어넣는 나주원이라는 캐릭터가 조금 낯설 수도 있겠다. 어느덧 10년차 배우가 된 유선(35). 다소 늦은 시작이었고, 한때 정체되는 느낌도 있었지만, 최근 이 배우의 행보는 심상치 않다.

'글러브'에서 유선의 모습을 보며 문득 든 생각은, 이 배우가 10년 전 데뷔 때보다 오히려 젊어 보인다는 착각(?)이다. "얼마 전에 모교(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에 특강을 하러 갔는데, 교수님들이 그러셔요. 1학년 때랑 똑같다고요. 아니, 그때보다 더 좋아졌다고도 하시고요." 신입생이었지만 세상 풍파 다 겪은 것처럼 노숙해 보였던, 동기들에게도 '최소한 삼수'는 했거니 오해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의 '젊어진 유선'에겐 세월의 깨달음이 준 편안함이 묻어난다.

"그땐 한순간도 긴장을 놓지 못했어요. 배우의 꿈을 이뤄야 한다는 생각에 굉장히 예민했고요. 어느 순간 바로 낙오자가 될 수도 있다는, 자리를 박탈당하고 소리 없이 잊혀질 수 있다는 마음에 쉼없이 채찍질했고요." 이런 긴장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나무를 보던 위치에서 숲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옮겨갔던 '작은 한 발자국' 덕분이었다.

초등학교 때 아이들의 박수 소리에 희열을 느끼던 배우 유선이 어느덧 데뷔 10년차가 됐다. 세월의 깨달음으로 이제 유선의 얼굴에선 편안함이 묻어난다.

"드라마 '그 여자가 무서워'에서 원톱으로 작품을 이끌며 하루에 90신 넘게 찍을 때도 있었어요. 드라마 끝나고 연극을 하다 미니 시리즈 '떼루아'를 했는데 역할의 비중이 갑자기 작아진 거예요." 유선에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보여주는 것'만을 고민했던 과거의 생각은 조금씩 유연해졌다.

"기회가 갑자기 확 열리는 게 아니고 타이밍이라는 게 있는 거구나, 어떤 조화를 이뤄야지 나 혼자 열심히 한다고 해서 빛나는 게 아니구나…. 인생의 짐들을 내려놓게 된 거 같아요. 편안해지고 자유로워지니까 얼굴에도 드러나는 것 같고요." 이후 드라마 '솔약국집 사람들'과 영화 '이끼' '글러브'에서 만난 유선의 연기가 왠지 모르게 조금 달랐다면, 그건 '내면의 다이어트'를 한 결과다.

유선이 대중에게 처음 이름을 알린 계기는 연극원 4학년 때 출연한 박광수 감독의 디지털 영화 '빤스 벗고 덤벼라'였다. 실제 상황과 픽션 사이의 경계가 모호한 실험적 프로젝트였고, 이때 처음 접한 유선은 상업영화나 TV 드라마보다는 독립영화나 예술영화에 더 어울리는 이미지였다. 그런데 우연히 영화 정보 프로그램 MC 제의를 받아 갑작스레 TV에 데뷔했고, 드라마 출연으로 이어졌다. 스물여섯 살이었다. 늦은 만큼 꾸준하고 착실하게 다져간 필모그래피엔 10편이 넘는 드라마와 5편 이상의 영화가 쌓였다.

이런 꾸준함은 그녀가 처음 배우의 꿈을 품었던 초등학교 1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매주 토요일 학예회에서 친구들과 팀을 만들어 작은 연극도 꾸미고 가수 모창을 했다. 아이들이 웃기도 하고 박수도 쳐줄 때 느꼈던 그 희열은 이후 '진짜 배우'가 되기까지 단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감정이었다. 학예회 무대 이후 18년 만에 배우로 데뷔한 유선에게 '성실한 배우'라는 레이블이 붙을 수 있었던 건 "지금 하고 있는 작품은 다음 작품을 위한 기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종의 책임감이며, 유선을 전진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드라마에선 지적이고 차분한 커리어 우먼과 터프하고 당찬 여자를 오갔고, 영화에선 호러와 스릴러 장르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어필했던 유선. 그녀에게 하고 싶은 캐릭터를 묻자 "웬만한 역할은 나에게 다 새로운 도전"이라고 말한다. 영화에선 아직 해보지 못한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작은 역할을 맡은 장진 감독의 '로맨틱 헤븐'이 개봉하고, 악역 조연에 도전한 장윤현 감독의 '가비'와 짙은 모성애를 보여줄 '돈 크라이 마미'촬영에 들어가는 2011년은 '영화배우 유선'에겐 어떤 전환기다. "이전엔 영화계에 제자리가 많이 없어서, 마음껏 저를 드러내지 못했던 것 같아요. 올해는 유선이라는 배우의 자리를 만드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해요." 그 결실을 만날, 이 배우의 내년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