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의 이스트런던 지역에 있는 로열런던병원(The Royal London Hospital)은 역사가 270년이 넘는 유럽 최대 규모의 종합병원이다. 영국의 자존심과도 같은 이 병원은 몇 해 전만 해도 명성에 걸맞지 않게 '지저분한 병원'이라는 오명을 갖고 있었다. 낙후된 지역에 위치한 데다 수백년 동안 무질서하게 병원이 팽창됐기 때문이었다. 그랬던 병원이 최근 대규모 증·개축을 통해 유럽 최고의 병원으로 부활했다. 7년여 동안 16억파운드(약 2조7800억원)가 들어간 영국 병원 역사상 가장 큰 프로젝트였다.
이 역사적인 프로젝트를 담당한 주인공은 한국계 영국인 건축가 크리스 윤(43·한국명 윤성준)씨였다. 윤씨는 전 세계 3000여명의 직원을 둔 미국계 대형 건축설계사무소 HOK의 런던법인 부사장이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나 고교 시절 미국으로 이민갔다. 컬럼비아대 건축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에서 활동하다가 1997년 영국으로 무대를 옮겼다. '현대 건축의 전시장'으로 불리는 런던에서 '바클레이스은행(Barclays Bank) 본사', '바츠(Barts)병원', '웨스트 인디아 키' 등의 건물을 설계하며 활약 중이다. 최근 안식년을 맞아 한국에 들어와 동부건설에서 고문을 맡고 있는 윤씨를 만났다.
"로열런던병원은 건물 자체도 뜻깊지만 영국 건축문화의 저력을 배울 수 있었던 기회였어요." 윤씨는 영국이 왜 건축의 선진국인지를 보여주는 시스템을 강조했다. 로열런던병원 증·개축의 경우 현상 설계는 2004년에 발표됐지만 프로젝트 구상은 그보다 10년 앞선 1990년대 중반에 시작됐다. "건물 소유주인 NHS(National Health Service·국민건강보험)는 단순히 병원 하나를 짓겠다는 게 아니라 역사적으로 길이 남을 건축물을 짓겠다는 생각으로 접근했어요."
NHS는 개념미술 1세대로 유명한 영국 작가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을 이 건물의 아트 디렉터로 선정해 윤씨와 함께 작업하도록 했다. 윤씨는 "병원 건물에는 잘 안 쓰는 코발트 블루와 터키 블루를 외벽에 썼는데 그 색을 찾는 데만 1년 넘게 걸렸다"며 "'빨리빨리'를 외치는 한국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역사적인 건물이었기 때문에 '잉글리시 헤리티지(English Heritage)', 'CABE(Commission for Architecture and the Built Environment·건축환경위원회)' 등 8개 비영리 문화단체로부터 디자인 심사를 받아야 했다. 윤씨는 "여러 사람이 합심해 디자인 감각을 모아 예술을 탄생시키는 과정이었다"며 가이드라인 없이 마구잡이로 이뤄지는 한국의 공공건축과 비교했다.
런던의 국제금융지구 카나리 워프에 있는 바클레이스은행 본사 설계는 잊을 수 없는 프로젝트다. 외국 건축가에게 지나치리만큼 폐쇄적인 영국 금융회사인 바클레이스가 윤씨에게 프로젝트를 맡기기로 한 날 9·11 테러가 터졌다. 이후 바클레이스측은 "보잉 747기가 돌진해도 끄떡없는 건물을 지어달라"고 특별 주문했다. 그래서 이 건물은 중심에 콘트리트 1m 두께의 엘리베이터 코어를 만들어 비행기가 돌격해도 외벽은 무너지지만 골조는 무너지지 않는 구조를 적용했다.
한국 건축을 바라보는 시선엔 안타까움이 많이 묻어났다. "다니엘 리베스킨트, 마리오 보타처럼 고층 건물 경험이 거의 없는 건축가가 한국에서는 전공과 무관하게 고층 건물을 짓는 건 아이러니지요. 이름만 보고 외국 건축가를 데려와서는 안 돼요. 결국 우리의 훌륭한 건축가들이 설 땅을 그들이 가지고 가는 거니까요." 윤씨는 "해외에서의 경험을 발판으로 고국에서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공공건물을 짓는 게 꿈"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