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2월 일본 오사카에서 한국과 일본이 미식축구 월드컵 출전권을 놓고 맞붙었다. 일본은 1999년 이 대회 초대 챔피언이었다. 그때 박경규 미식축구협회장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재일교포 선수들을 찾아나섰다.

당시 교토(京都)대 미식축구팀 출신의 김기언(34)이 박 회장의 레이더에 걸렸다. 김기언은 씩씩하게 "한국 대표로 뛰겠다"고 말했다. '자이니치(在日)'로 살아온 그에게 태극 마크는 가슴 떨리는 제안이었다.

결과는 0대88, 한국은 단 1점도 뽑지 못했다. 한·일 양국을 오가며 국제변호사로 활동하는 김기언은 내년 2월을 손꼽아 기다린다. 한국은 2월 27일 일본과 2011 오스트리아 월드컵 출전권을 다툰다.

재일교포 3세인 김기언은 2003년 일본에 당한 0대88 참패를 설욕하기 위해 오늘도 뛴다. 국제 변호사로도 활동 중인 그는“정신력만큼은 한국 팀이 일본을 앞선다”고 했다.

"2007년엔 일본 사법연수원에 있느라 참가하지 못했어요. 이번이 88점 차의 아픔을 씻을 마지막 기회입니다." 지난 3월 일본 이시카와현에서 살해된 채 발견된 한국인 여성 사건을 맡아 정신없이 바쁘지만 운동은 잊지 않고 있다.

'김 노리히코'란 일본 이름의 김기언은 일본 도치기현 우쓰노미야에서 재일교포 3세로 태어났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으로 넘어간 할아버지는 파친코를 운영했고 아버지가 이를 물려받았다.

"아버지는 늘 '한국인으로 자긍심을 가지라'고 하셨어요. 김씨 성을 가진 대부분이 가네다(金田)나 가네코(金子)로 성(姓)을 바꿨지만 저희는 '김'으로 살아왔습니다." 어린 시절엔 한국인이란 이유로 '왕따'도 많이 당했다.

"김치 냄새 난다고 너희 땅으로 돌아가란 말을 많이 들었죠.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운동을 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를 시작해 고등학교 시절엔 도치기현 베스트8에 선발됐다.

하지만 꿈의 무대인 고시엔(甲子園)대회에 서기엔 실력이 모자랐다. 야구 배트를 놓고 그는 차별받는 재일교포들을 위한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책을 잡았다. 1년 재수 끝에 교토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미식축구를 만났다. 교토대는 리쓰메이칸(立命館)대와 함께 간사이(關西)를 대표하는 미식축구 명문이다. "예전부터 도쿄를 중심으로 한 간토(關東) 지역은 럭비, 간사이는 미식축구가 유명했습니다."

김기언은 3·4학년 때 전(全)일본 베스트22에 선발될 정도로 유능한 오펜시브 라인맨(1선에서 상대 수비로부터 쿼터백을 보호하는 포지션)이었다. 변호사의 꿈을 이룬 그가 올해 한국어 공부를 위해 모국을 찾았다.

지난 7월엔 자비로 한국에 온 7명의 '자이니치'와 대구에서 대표팀 훈련을 소화했다. 사령탑 역시 재일교포 3세 김용수(45) 감독이다. "저희는 일본에선 어쩔 수 없는 '마이너리티'입니다. 같은 고민을 하는 친구들과 함께 일본을 상대해 보겠습니다. 적어도 기합은 우리가 앞설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