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신수가 그때 투수로 남기를 고집했다면 과연 어떻게 됐을까.
야구대표팀의 금메달 획득은 50%는 추신수의 활약 덕분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중요했던 대만과의 두차례 경기, 중국과의 준결승전에서 모두 값진 타구를 날렸다.
이쯤에서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추신수가 투수가 아닌 타자로 방향을 잡게 됐던 시점이다. 추신수의 야구인생에서 큰 전환점이 된 사건이었다.
▶"추! 방망이를 잡아봐"
2000년. 부산고 3학년인 추신수. 시애틀 매리너스의 스카우트 관계자 두명이 그해 늦여름 부산고 교정에서 그를 테스트했다.
그때 당연히 피칭부터 했다. 시애틀 극동담당 스카우트인 짐 콜번(현 텍사스 스카우트)이 추신수에게 직구 위주로 던져볼 것을 주문했다. 잠시후 변화구도 주문한 뒤 함께 있던 동료와 상의하기 시작했다.
잠시후 콜번은 추신수에게 배트를 잡고 타격을 해보라고 요청했다. 부산고 후배들이 타구를 수습하기 위해 외야로 우르르 몰려나갔다. 프리배팅에서 추신수는 홈런성 타구를 펑펑 날렸다.
한달이 채 지나지 않아 추신수가 시애틀과 계약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차세대 외야수'로 키운다는 내용이었다. 투수가 아닌 야수로 스카우트한 것이다.
▶투타 모두에 능했던 추신수
추신수가 야수로서 시애틀에 입단한다는 소식은 꽤나 뜻밖이었다. 미국 진출은 당연히 투수로서 이뤄질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부산고 시절 추신수는 대통령배에서 두해 연속 MVP와 우수투수상을 받았다. 게다가 2000년 8월에 열린 캐나다 에드먼튼의 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서도 투수로서 인상이 깊게 남았다.
당시 미국과의 결승전에서 9대7로 승리할 때, 추신수는 마운드에 두차례나 올랐다. 선발 이동현(당시 경기고)에 이어 두번째로 등판한 추신수는 초반엔 두들겨맞았다. 두 투수가 7안타를 허용해 2회까지 1-4로 뒤졌다. 한국대표팀은 부지런히 따라붙었고 6-6 동점에서 연장전에 들어갔다. 야수로 포지션을 옮겼던 추신수는 연장 11회에 다시 마운드에 올라 2⅔이닝을 무안타 무실점으로 막았다. 그때 추신수는 대회 MVP와 함께 왼손투수상을 차지했다. 베스트9에도 뽑혔다. 투수로서 18이닝 동안 5실점 32탈삼진의 기록을 남겼다.
바로 이런 인상 덕분에, 추신수의 시애틀 입단은 당연히 투수로서 이뤄질 것이라는 예측이 있었다. 하지만 시애틀은 처음부터 '타자 추신수'도 눈여겨봤던 것이다.
▶고교때 방망이는 재미삼아!
추신수와 몇달전 국제전화로 원격 '10대1 인터뷰'를 진행한 적이 있다. 당시 투수에 대한 미련이 없느냐는 질문이 있었다.
추신수는 이와 관련, "고교때 개인훈련은 모두 투수 훈련만 했다. 사실 방망이는 재미삼아 쳤다. 지금은 투수에 대한 미련을 끊었다. 지금 나에게 '파이브툴' 얘기를 많이들 하시는데 나도 처음엔 모두 잘했던 게 아니다. 미국쪽에서 타자로서 그중 몇가지 가능성을 봤던 것이다. 잘 달리고 어깨는 강했지만, 수비는 미국 와서 훈련을 많이 했고 파워도 키웠다"고 설명했다.
재미삼아 쳤던 방망이라는 표현이 재미있다. 대체로 투수쪽 훈련이 타자 훈련보다 지루하고 힘들다는 게 모든 야구인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지루한 투수 훈련 와중에 재미삼아 쳤던 방망이 실력이 지금은 메이저리그 최상급 레벨 외야수로 성장한 배경이 된 셈이다.
만약 추신수가 해외 진출을 하지 않았다면 투수로 뛰었을까, 타자로 뛰었을까. 또한 시애틀이 그를 타자가 아닌 투수로 데려갔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그해 부산고 교정에서 추신수는 짐 콜번의 지시에 따라 묵묵히 스파이크를 갈아신으면서도 의아한 표정이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참으로 엄청난 변화의 출발점이었다.
김남형 기자 star@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