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만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 있을까?

인천 시민에게 다소 생소하겠지만 인천학(仁川學)이라는 것이 있다. 인천의 역사·문화·철학·정체성 등 인천에 관한 여러 사실을 밝혀보려는 학문이다. 이를 맡고 있는 인천학연구원이 남구 도화동 인천대 제물포캠퍼스 학산도서관 1층에 자리를 잡고 2002년부터 9년째 인천을 연구하고 있다.

"송도에 높은 건물이 올라간다고 그게 진정한 인천의 명소가 될까요? 서울의 서대문·동대문 등 4대문처럼 인천도 그런 역사적인 현장을 찾아 명소로 만들어야죠. 이를 위한 기초적 연구를 저희들이 합니다."

이준한 인천학연구원장이 그동안 연구원에서 펴낸 서적을 바탕으로 연구활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지난 4일 연구실에서 만난 이준한(45·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인천학연구원장의 말이다.

인천학연구원은 2002년 인천의 송도가 매립되고 고층 빌딩이 들어서는 등 개발붐을 맞고 있을 때 전임 시장이 '인천의 역사적 정체성도 같이 연구해야 한다'는 취지로 만들었다고 그는 설명했다. 연구원에는 현재 상임연구위원 1명과 초빙연구위원 2명 등 모두 4명이 몸담고 있다.

인천이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삼국시대 미추홀(彌鄒忽)이라는 이름부터다. 그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태종(太宗) 때인 1413년 10월 15일 인천(仁川)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갖게 됐다. 인천이라는 이름만으로도 600여년에 가까운 역사를 지닌 것이다. 그러나 이 원장은 "역사는 깊지만 많은 사람들이 인천을 '짠물'이나 '자장면의 탄생지' 정도로만 알고 있다"고 말했다.

숨겨진 인천의 역사를 찾기 위해 연구원들은 인천시립박물관부터 전국의 대학도서관·공공기관을 찾아다니며 '인천'이라는 두 글자가 들어간 모든 자료를 뒤진다. 이 중에는 일본어·중국어책이나 번역서들도 많다. 유물이나 고문서(古文書)를 모으는 수집가를 찾아내 돈을 주고 자료를 열람하기도 한다. 1년에 1~2차례씩은 일본·중국·대만 등의 박물관과 연구소를 찾는다.

이 원장은 "개항기 이후 일본·중국인들이 만든 기록들이 전국에 흩어져 있다"며 "이를 통해 연구원이 개설되기 전까지는 단편적인 사실로만 알고 있던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많이 밝혀냈다"고 말했다. 예를 들면 1883년 개항 당시 제물포 포구에는 100여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었고, 개항 첫해인 1883년엔 348명, 1893년엔 2만5042명의 일본 관리·무역상 등이 입국한 사실 등을 찾아냈다. 최근엔 영종도가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주요 유적지임을 밝혀내기도 했다.

"1000만원을 들여 영종도 조사를 했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청동기시대 때 200가구가 영종도에 살았다는 거예요. 우리나라 전체적으로 확인된 것은 30가구뿐입니다. 그곳에서 '오수전(五銖錢)'이라는 중국 화폐가 나왔어요. 이미 청동기시대 때 영종도가 중국과 교류하는 전초기지였던 것이지요."

이 원장은 이에 대해 "시 관계자들을 만나 '영종도 청동기 발굴터에 투자해 관광 모델로 만들어보라'고 건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인천학연구원은 개항 당시 인천에 살던 일본·청나라·조선인들의 거주환경을 보여주는 거류지 지도를 연세대도서관에서 발견하기도 했고, 1910년대 인천의 대표 중국 요리점인 '중화루'의 간판이 인천시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것을 찾아 그 의미와 가치를 연구 중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인천의 노동운동·문화사 등을 담은 18권의 서적을 번역하거나 발간했고, 54회에 걸친 세미나·국제학술대회를 열었다.

이 원장은 예산 부족이 가장 큰 어려움이라고 말했다. 문을 연 첫해엔 시로부터 5억원의 예산을 받았지만 지금은 2억원이 조금 넘는 예산을 받아 운영 중이며, 시 재정 상태에 따라 연구위원들이 일을 그만두기도 했다고 한다.

"개항기뿐만 아니라 고고학·문화·철학·현대 등 인천에 연구할 분야가 많은 만큼 시에서 더 많은 지원을 해주면 좋겠습니다. 훗날 인천시민들이 자녀에게 인천의 역사와 유물 등에 대해 당당하게 설명해줄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도록 그때까지 인천의 숨겨진 역사를 하나씩 밝혀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