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산포에서는 사람은 슬픔을 만들고

바다는 슬픔을 삼킨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이 슬픔을 노래하고

바다가 그 슬픔을 듣는다

파울루 코엘류의 연금술사가 큰 인기를 끌고, 주위에서 스페인의 산티아고 걷기 열풍이 불었을 때 나는 좀 씁쓸했었다. 뭐랄까. 그건 마치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들으며 가보지도 않은 남의 나라엔 애잔한 향수를 느끼면서, 정작 경복궁이나 창덕궁을 추억하는 변변한 노래 하나 없는 우리 자신의 아이러니와 일치했다. 그 시절 나는 옛 동네를 밀고 아파트를 꽂아 넣는 '뉴타운정책' 때문에 우리에겐 정작 걸을 만한 길이 없다고 소설에 썼었다. 우리는 대규모 도시정책 때문에 졸지에 고향을 도둑 맞은 첫 번째 세대가 될 것이라고.

‘관광도시 제주도’는 자동차에서 내려 걸음을 떼는 순간 화장을 지운 민얼굴의‘참제주도’로 탈바꿈한다. 고즈넉한 성산포의 바닷바람에는 일상에 지친 마음을 훌훌 털어버리게 하는 힘이 있다. 사진은 제주 올레 14코스, 월령리에서 협재해수욕장 가는 길에 있는 등대.

아마도 이 길을 알지 못했다면 제주 또한 그러했을 것이다. 제주도는 오랫동안 내게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하는 '관광도시'였다. 공항에 도착하면 곧장 렌터카를 빌리고 중문 관광단지로 들어가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주변 식당에서 해물뚝배기로 허기를 채우고 호텔 창 밖에서 바다를 보는 휴양지. 시간을 더 낸다면 차를 타고 바닷길을 따라 민속촌, 여미지 식물원, 테디베어박물관이나 용머리해안, 성산포 같은 정해진 코스를 한 바퀴 돌고 오는 게 다였다. 그 옛날 최성원이 아련한 목소리로 '떠나요~ 둘이서,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리고'라고 속삭인들 딱히 제주도에 가서 뭔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그건 '붉은 노을'을 이문세의 노래가 아닌 빅뱅의 노래로 알고 있거나 '가시나무새'를 인간 존재의 나약함을 고백했던 '시인과 촌장'의 노래가 아닌 '조성모'의 곡으로 알고 있는 것과 비슷한 어감이었다. 중학생인 조카 역시 최성원의 '제주도 푸른밤'을 성시경의 곡으로 알고 있었다. 그건 누군가의 민얼굴이 아닌 예쁘게 메이크업을 한 얼굴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작년 가을, 나는 열흘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 섬의 구석구석을 걸었다. 제주도의 속살은 분명 '걸어야만'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자동차를 타고 서귀포 해변을 달린다면, 물질 끝에 올라오는 해녀를 마주칠 순 있어도 그들과 이야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기이한 화산섬의 진짜 이야기와 바람은 직접 두 발을 움직여 걷는 사람에게만 열리는 경이로운 것이었다. 관광이 비로소 여행이 되는 지점 속에는 무릇 사람이 있고, 제주 할망들이 파는 진짜 제주 음식이 있다. 돼지국수나 갈칫국, 보말비빔밥 같은 음식들 말이다.

무엇보다 걷는 여행에는 위로가 있다. 올레를 걷는 사람들 중 유독 혼자인 사람이 많고, 나이 든 여자가 많은 건 이 섬이 가지고 있는 온화함을 잘 보여준다. 화산이 터져 군데군데 분화구가 남아 있는 이 오래된 섬에는 누이의 가슴처럼 둥근 '오름'이 수백 개나 된다. 사진가 김영갑의 작품 속에 담긴 제주의 민얼굴은 스스로 이곳까지 걸어온 내게 가만히 길을 열어주었다. 폐교를 고쳐 만든 그의 아름다운 갤러리 '두모악'은 올레 3길에 외따로이 위치해 있다.

호텔이 빽빽한 중문단지에서 작정하고 조금만 내려와도 화산 폭발이 바꾸어 놓은 제주의 각별한 지형과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 전쟁 때문에 일본군이 파놓은 수많은 동굴들을 살펴볼 수 있다. 땡볕에 힘든 해변 길을 걷는 게 부담스럽다면 깨끗하게 길을 닦아 놓은 외돌개를 구경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다만 '추노'나 '대장금' 같은 드라마 촬영지로도 알려진 제7코스에는 단체 관광객들이 종종 출몰해서 고즈넉한 분위기를 가지기는 힘들다.

누군가는 제주도 하면 섭지코지의 '올인하우스'에서 나풀거리는 긴 머리의 송혜교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나로 말하면 제주도 하면 늘 성산포 앞바다가 떠올랐고, 이생진의 '그리운 바다 성산포'가 그려졌다. 얼굴 사이로 부는 선명한 바닷바람을 몸으로 느끼며 이 바람의 섬이 내게 준 작은 위로들도.

'성산포에서는 사람은 슬픔을 만들고 바다는 슬픔을 삼킨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이 슬픔을 노래하고 바다가 그 슬픔을 듣는다…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죽어서 실컷 먹으라고 보리밭에 묻었다. 살아서 술을 좋아하던 사람 죽어서 취하라고 섬 꼭대기에 묻었다. 살아서 그리웠던 사람 죽어서 찾아가라고 짚신 두 짝 놓아 주었다. 365일 두고두고 보아도 성산포 하나 다 보지 못하는 눈. 육십 평생 두고두고 사랑해도 다 사랑하지 못하고 또 기다리는 사람.'

제주도에 가면 일단 걸어볼 일이다. 스페인어도, 영어도 못하는 어느 단출한 여행자라도 이 섬은 우리를 주눅들게도, 고달프게도 하지 않을 것이다. 가끔씩 마주치며 듣는 기이한 제주 방언이 흡사 알아듣지 못할 외국어처럼 들리더라도 그것은 결코 우리를 기죽이지 않고, 한껏 웃으며 정겹게 할 터이니.


제주도 푸른밤 - 80년대 대표적인 그룹 '들국화'의 멤버이자 프로듀서, 작곡가로 활동한 최성원의 곡. '제주도 푸른밤'은 들국화 해체 이후 그가 만든 최성원 1집에 수록된 곡이다. 최성원은 '매일 그대와' '이별이란 없는 거야' 같은 아름다운 곡을 작곡했고, 훗날 그룹 '패닉'의 프로듀서를 맡기도 했다.

그리운 바다 성산포 - 1978년 출간되어 30년간 꾸준히 사랑을 받아온 시인 '이생진'의 시집. 시인 이생진은 '현대문학'으로 등단했고 윤동주문학상 등을 받았다. 해마다 여름이면 시집과 화첩을 들고 섬을 돌아다녔다는 시인은 유독 제주도를 사랑했는데, '그리운 바다 성산포'는 제주 성산포를 배경으로 바다와 섬의 고독을 이야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