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일의 썸머'를 본 건, 한겨울 비행기 속이었다.LA에서 서울로 돌아오던 비행기였는데, 영화를 보다 보니 이 영화 속 주인공이 사랑을 나누는 장소가 내가 한 달 가까이 머문 'LA'였다. 영화는 대담하게 시작됐다. "이 영화는 허구이므로 생존 혹은 사망한 사람과 어떤 유사점이 있어도 완전히 우연이다. 특히 너, 제니 베크먼 나쁜 년!" 시큰둥하게 앉아 있던 나는 자세를 고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기대에 부응하듯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남자 주인공 톰은 여자 주인공 썸머에게 된통 당하며 차이는데, 그들의 대사 또한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착시현상을 불러일으켰다.

‘500일의 썸머’는 LA가 배경이다. LA하면 떠오르는 화려하고 웅장한 관광지는 등장하지 않는다. 주무대는 다운타운 구석구석. 잔잔한 로맨틱 코미디 배경으로는 제격인 친숙한 시내다. 톰이 구직 면접을 보는 빌딩(왼쪽에서 두 번째), 극중에서 톰이 가장 좋아하는 파인아츠빌딩(왼쪽에서 세 번째).

―(썸머) 우리 지금 뭐 하는 거야? 이게 지금 정상인 거야?

―(톰) 정상? 난 모르겠는데. 난 행복해. 별 상관없는데. 넌 싫어?

―(썸머) 자긴 지금 행복해?

―(톰) 넌 안 그래?

―우린 만나면 싸우기만 해.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 마.

―우린 한 달 내내 시드와 낸시 같았어!

―썸머, 시드는 낸시를 칼로 일곱 번이나 찔렀어. 우리가 의견이 엇갈리긴 해도 내가 시드 비셔스 같진 않아.

―아니, 내가 시드 같다고!

―그럼 내가 낸시야?

―일단 먹고 얘기하자.

―음… 맛있겠네. 헤어지기로 해서 너무 잘된 것 같아. 난 이 집 팬케이크가 정말 좋더라. (어이없어 자신을 쳐다보는 톰에게 의뭉스러운 얼굴로) 왜?

―(멍한 얼굴로 일어나 식당 밖으로 그냥 나가버리는 톰)

―(톰의 뒤통수에 대고) 톰, 가지 마! 자긴 아직까진 좋은 친구잖아!

고백하자면 나는 연애에서 대부분 차이는 쪽이었다. 그러므로 톰에게 감정이입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더구나 나는 썸머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은 우리가 '서정시대'라 부를 법한 순수하고 어리석던 시절에 '첫사랑'이란 이름으로 다가와 우리의 넋을 빼앗아가는 팜므파탈(혹은 옴므파탈)들이니까 말이다.

사랑을 변증법이나 논리적인 도표로 설명할 수는 없다. 사랑의 유통기한이 3년이라거나, 사랑이 테스토스테론이나 도파민 같은 호르몬 칵테일 어쩌고 하는 과학자들도 있지만 그런 얘길 실연당한 친구에게 위로랍시고 했다간 욕이나 먹기 좋을 테니까. '500일의 썸머'는 바로 실연당한 남자의 헝클어진 머리처럼 뒤죽박죽이다. 영화는 488일째 자주 가던 공원에서 우연히 만난 썸머와 톰을 시작으로, 사랑이 이글거리던 100일 전후의 어느 날로 넘어가더니, 난데없이 이별을 통보받고 접시를 깨던 290일째로 넘어간다. 누군가의 말이 맞다. 사랑에 기승전결 따위 있을 리 없는 것이다. 영화는 이런 독특한 구성에 '더 스미스'나 '레지나 스펙터'등의 음악을 배치하고, '알랭 드 보통'의 '행복의 건축' 같은 다양한 문화적 뉘앙스를 버무린 덕분에 대책 없는 사랑에 빠졌다가 실연당한 남자의 쿵쾅대는 심장 같은 독특한 영화적 맥박을 얻게 되었다.

영화 '노팅힐'에 런던이 빠질 수 없듯, 우디 앨런의 '애니홀'에뉴욕이 빠질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LA가 한 번도 로맨틱 코미디에 어울리는 도시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지만 '500일의 썸머'에서의 LA는 배경 이상의 역할을 한다. 톰과 썸머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곳도 공원 벤치에 앉아 톰이 썸머에게 자신이 LA에서 가장 좋아하는 건축물을 이야기하면서부터이다. 또한 이 영화의 가장 낭만적인 부분 역시 종이가 없던 톰이 썸머의 팔에 자신이 세우고 싶은 건축물의 그림을 그릴 때이기도 하다. 매끈한 팔목에 볼펜이 와 닿을 때마다 느껴지는 간지러움이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하려는 연인들의 간질간질한 설렘처럼 느껴지는 풍경이다.

건축가가 꿈인 톰의 시선은 부동산 광풍을 타고 새로 지어진 LA의 고층 건물이 아닌 오래된 벽돌 건물이나 계절이 스친 아름다운 길에 머물러 있다. 톰의 시선은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었던 LA의 이미지, 가령 범죄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처절한 '암흑도시'나 화려한 할리우드 스타들이 사는 베벌리힐스, 거대한 쇼핑센터, 디즈니랜드나 유니버설 스튜디오와는 사뭇 다른 이미지들이다. 한두 블록마다 어김없이 나타나는 타코벨, 인 앤 아웃 버거, 맥도널드 같은 대형 프랜차이즈와도 거리가 멀다. LA는 내게 언제나 '거대한' 혹은 '비정한' 또는 '화려한'이란 형용사를 붙이기에 적당한 도시였다. 하지만 푸른색 옷을 입은 사랑스러운 썸머처럼 이 천사의 도시는 내게 또 다른 뉘앙스를 주었다.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 서울은 커다란 겨울 담요를 덮은 것처럼 폭설에 뒤덮여 있었다. 눈에 잠긴 이 진공의 도시 앞에서 멍해졌었다. 나는 몇 시간 전까지 캘리포니아의 햇볕 속에 있던 내 모습과 '500일의 썸머'의 결말을 떠올렸다. 실연당한 남자 '톰'이 새로운 여자 '어썸'(가을)에게 빠져들며 난데없이 데이트 신청을 하는 마지막 장면을 말이다. 계속해서 눈이 내렸다. 기상청은 이 눈이 1907년 대한민국 기상관측 이후 103년 만의 최대 폭설이라고 했다. 사랑 또한 이처럼 난데없이 찾아오는 것이리라. 오도 가도 할 수 없는, 꼼짝없이 갇혀 버린 그때의 나처럼.

●500일의 썸머

뮤직비디오 감독 출신인 마크 웹의 장편 영화로 조셉 고든 레빗이 남자 주인공 '톰'을, 주이 디샤넬이 여자 주인공 '썸머'를 맡았다. 톰은 어느 날 사장의 새로운 비서로 나타난 썸머를 본 순간 강렬한 감정을 느끼고 그녀에게 빠져든다. 그러나 사랑을 눈곱만큼도 믿지 않고 구속받기 싫어하는 썸머로 인해 둘의 갈등은 점점 깊어진다. 마치 알랭 드 보통의 에세이를 소설로 표현한 듯한 이 영화는 사랑에 빠지고 실연당한 연인의 내면 풍경을 다양한 기법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로 연출력을 인정받은 마크 웹은 '스파이더맨 4'의 감독을 맡을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