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패망한 지 65년이 흘렀지만 당시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들의 고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강제징용된 원폭 피해자들은 공장에서 죽도록 일하다 임금 한푼도 받지 못한 채 빈손으로 돌아와 수 십년 간 신체적 고통을 겪으며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 회사를 상대로 피해 보상을 요구했지만 그들은 외면했다. 한국 정부도 해준 게 없다.
일본 정부는 그동안 한국에 나가사키 의사들을 수 차례 보내 원폭 피해자들을 진찰했지만 명확한 병명을 밝히지 않고 있다.
경기 평택시에 있는 한국원폭피해협회 기호지부 미쓰비시동지회(회장 이근목 88)는 1972년 결성됐다. 경기·충청·강원 출신으로 당시 강제 징발을 당해 미쓰비시기계공작소(三陵機械工作所)와 미쓰비시조선공작소로 끌려갔던 징용자 276명은 속속 세상을 떠나고 현재 40여 명만 생존할 뿐이다. 1945년 8월6일 오전 8시15분. 작전명 '에놀라게이'를 부여받은 '폴 티베츠' 장군이 조종하는 미군 B-29폭격기 한 대가 일본 히로시마현(縣) 히로시마시 상공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정확히 43초 후 강력한 섬광과 함께 거대한 버섯구름이 하늘로 치솟았다.
'맨해튼 프로젝트(미국 핵무기개발계획)'로 촉발된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의 비극은 이렇게 시작됐다. 무자비한 폭격의 결과는 참혹했다. 섭씨 4000도의 강력한 열폭풍에 사람들의 얼굴은 시커먼 화상을 입고 처참히 찢어진 살갖은 너덜거리며 피비린내로 물들었다. 당시 14만여 명이 불에 타 사망하고 35만여 명이 히바쿠샤(피폭자) 피해로 죽거나 사망했다. 이 중 3만여 명은 한국인이었다.
1944년(소화 19년) 9월 경기 평택시(당시 평택군)지역에선 20~23세 가량의 청년 200여 명이 일제에 의해 1, 2차로 나눠 강제 징용됐다. 당시 일제는 면사무소에 '징용담당 부서'를 설치, 수시로 젊은 청년들을 강제로 끌어갔다.
일제는 안성국민학교에 청년들을 모아놓고 '안심하고 가라' 월급을 꼬박꼬박 반은 고향에 송금하고 반은 일본에서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를 철석같이 믿은 청년들은 부산에서 하카다항 배를 타고 기차로 히로시마에 도착, 미쓰비시조선기계공작소에서 일했다.
"일본 미쓰비시조선공작소에 가서는 쇳물을 녹여 배 연통 만드는 요카이바(용광로) 일을 했지. 용광로에서 일했는데 먼지도 심하고 뜨겁고 말이 아니었어. 가장 큰 고통은 배고픈 거였지. 세끼니 밤톨만한 고구마를 섞은 6홉밥에 반찬 2가지. 밥은 겨우 두 숫갈 정도야. 오전 8시 출근해 오후 6시 퇴근하는데 배가 고프니 몰래 시내 나가서 10전을 주고 묽은 '잡죽'을 사서 허기진 배를 채웠지."
"폭발 당일 9시께 공장에서 일하는데 갑자기 비상령이 내리더니 지하 방공호로 대피령이 내렸어. 공장에서 약 3㎞ 떨어진 히로시마 중심지 후쿠야라는 지역에 원폭이 투하됐는데 미리 구경나온 사람들은 심한 화상을 입었지. 오후 4시께 방공호에서 나와보니 도시는 온데간데 없고 공장 지붕은 날아가고 쇠기둥만 남았어. 시내는 온통 잿더미에 불바다였지."
"폭발이 나고 공장은 문을 닫았어. 일본사람 한국사람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한국사람 6명이 무작정 집으로 가자며 길을 나섰어. 시모노세키로 걸어오면서 남의 집에 들어가 일도 해주고 밥을 얻어먹었지. 배가 고파서 바다에 뜬 귤껍질을 건져 허기를 때우며 버티다 겨우 뱃삯을 구해 집으로 왔지.
"내가 9월 중순에 돌아왔는데 10월 중순께 미쓰비시공장에서 일하던 사람들 240여명이 탄 배가 하관에서 출발해 현해탄을 건너다 배가 폭발해 몰살당했다는 말을 들었어. 일본 사람들이 배를 폭파했다는 말을 들었지."
1944년 9월 초 당시 22세 때 고향 원곡면에서 부모님과 함께 농사를 짓다 '국민 동원령'을 받고 강제 징용에 끌려가 히로시마 미쓰비시조선공작소에서 선박 연통 제작일을 하다 원폭투하로 공장이 파괴되면서 공장을 나와 시모노세키항을 통해 귀국한 이근목옹(88)의 증언이다.
함께 징용에 갔다온 김수천옹(90·평택시). 그도 역시 1944년 7월 진위면에서 농사를 짓다 징용에 끌려갔다.
"들에서 일하는데 면사무소 노무담당 면서기가 와서는 징용가야 한다고 했어. 평택과 부산에서 하룻밤을 자고 배를 타고 일본 시모노세키에 도착해 히로시마로 가서 미쓰비시공장에 도착했지. 처음 20일 정도는 교육도하고 관광도 시켜주더군.
쇳물을 녹이는 오카이바(용광로)에 배치돼서 일했어. 그날(원폭투하)은 전날 비가 왔어. 출근해서 일하는데 시내 쪽 하늘에서 갑자기 파란 불이 섬뜩하면서 폭발음과 함께 엄청난 바람이 날아와 공장건물이 통째로 날아가 버렸어."
"아침 8시쯤이었지. 천지를 뒤흔드는 꽝 소리와 함께 난데없이 하늘에서 번개가 치더니만 짙은 화약냄새를 동반한 회색빛 태풍이 공장을 덮쳤어.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떠보니 내가 20여m 공장 밖으로 날아가 내동댕이 쳐있었어. 바람이 얼마나 세던지 공장 건물은 물론 거대한 쇳덩이도 날려 버렸어. 태풍의 수 십배는 될거야. 당시 히로시마 인구가 100만 명이라고 들었는데 원폭으로 60만 명이 사상을 입었다는 말을 들었어. 참 끔찍했지."
김옹은 그 피해로 인해 오른쪽 발가락 전부가 신경이 마비돼 불구가 됐다. 오른손 중지도 휘었다. 당시 충격으로 인해 배꼽위 가운데에 사과 크기만한 딱딱한 혹이 돌출돼 있다. 둘째 딸은 결혼후 자녀 둘을 낳고 원인모를 병명으로 수 년 전 사망했다고 했다.
황종호옹(89·평택시)도 1944년 9월21일 평택군 대안리에서 징용으로 끌려가 미쓰비시 조선공작소 선박 엔진커버(덮개) 생산부에서 일했다.
"야간근무를 마치고 돌아와 기숙사에서 문을 열었는데 갑자기 꽝하는 굉음과 함께 회색빛 폭풍이 덮쳤어. 천지가 안개처럼 자욱했고 눈을 뜰 수가 없었어. 화약 냄새가 진동하면서 정신을 잃었지. 한참 후 깨고 보니 눈도 잘 안 보이고 귀도 들리지 않았어. 그때 폭음 이후 눈도 잘 안보이고 귀도 잘 안 들려."
"당시 히로시마 시내에 가보니 병원마다 온통 원폭 피해자들이 넘쳐났어. 모두 얼굴과 목, 손목 부위만 새카맣게 탄 화상환자들이 20명씩 조를 이뤄 치료받고 있는 장면을 봤어. 한 조에 덜 다친 사람 한 명씩은 이들에게 음식도 갖다주고 도와주고 있더군."
황옹은 "당시 미쓰비시공장에는 수 만 명의 근로자들이 일했으며 소위 간부 책임자들은 일본 사람들이었고 공고 실습생들과 한국인 생산직 종사자들이 약 80% 정도 였다"고 회고 했다.
이병욱옹(90)도 폭풍에 날아온 철판이 손목에 박힌 채 귀국해 50여년을 고생하다가 7년 전 일본에 건너가 병원에서 철판 제거 수술을 받고 돌아왔다.
당시 미쓰비시공장은 한국인 근로자들에게 월급 20원 가량을 지급키로 하고 절반은 한국의 부모에게 나머지는 현지 공장에서 당사자에게 지급하겠다고 약속했지만 한푼도 주지 않고 임금을 착취한 것이다.
일본 정부는 1993년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에게 보상비조로 4억 엔(약 40억 원)을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전달해와 한 사람당 매달 10만 원씩 지급했고 치료비와 의료비는 별도 지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히로시마 원폭피해자들은 전국에 약 3만5000여 명이 있었으나 상당수가 사망하고 현재는 약 2만 여명이 생존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스비시공장에 함께 근무하다 원폭피해를 입은 미쓰비시공장 기호지부 회원 46명은 1995년 5월 일본정부와 미스비시공장을 상대로 히로시마 지방법원에 한사람당 1억 원 씩을 지급하라는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해 2005년 1월 고등법원에서 승소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같은해 12월 항소해 대법원에서 패소했다.
당시 미스비시공장에 근무했던 박창환옹 등 57명은 1998년 일본에 건너가 후생성에서 예금증서를 발급해왔다. 미스비시가 한국인 징용자들들의 월급 중 일부를 적립한 근거를 찾아온 것이다. 이후 수 차례 예금 반환을 촉구 해 온 결과 2002년 얼마 되지 않은 전액을 돌려받긴 했지만 일본 적십자사에 전액 기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