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IBM 법무팀의 이상길(40) 변호사는 올 1월부터 '정규직 파트타이머'에다 '재택근무자'로 일하다 지난 4월 풀타임으로 복귀했다. 자녀 교육문제로 캐나다로 옮겨간 가족들을 따라가 3개월간 낮에는 가족들을 돌보고, 저녁 8시부터 자정까지 4시간 동안은 회사 업무를 했다. 원래 맡던 업무를 그대로 가져가 외국에서 '재택근무'를 한 것이다. 월급은 절반만, 건강보험 등 복리후생은 풀타임과 같이 100%를 받았다. 이 변호사는 "휴직을 하면 동료들에게도 부담이고 업무에 복귀할 때 '감'도 떨어질 것을 걱정했다"며 "가족도 챙기고 커리어도 유지하는 좋은 기회였다"고 말했다.

이 변호사 같은 정규직 파트타임제는 매우 드물지만 '퍼플잡(purple job·유연근무)'의 다른 형태인 재택근무·시차출퇴근제 등은 확산 추세에 있다.

◆아직 걸음마 단계인 한국

한국IBM 금융산업영업본부의 문상필(36) 차장은 시차출퇴근제를 이용하고 있다. 9시에 집에서 나와 20개월된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고 출근하는 시간은 오전 10시쯤이다. 문 차장은 "시간은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고 책임감은 높아진다"고 말했다.

유통업체 홈플러스는 지난 5월 시차출퇴근제를 도입해 현재 16명의 직원(여성 11명·남성 5명)이 사용하고 있고 대웅제약·듀폰코리아·한국MSD 역시 재택근무·시차출퇴근제 등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 4일 오전 10시, 아이를 어린이집에 바래다주고 서울 여의도 IBM 모바일오피스에 도착한 문상필 차장이 번호를 입력해 자리를 발급받고 있다. 한국IBM 직원 70%는 고정좌석이 없다. 이 회사는 정규직 파트타임제·재택근무제·시차출퇴근제 등 다양한 유연근무제를 활용하고 있지만, 아직 많은 국내 기업은 유연근무제 도입에 소극적이다.

정부는 정규직 파트타임제 등 유연근무제가 일자리 창출은 물론, 저출산 문제 해결에도 도움을 줄 것으로 보고 시범사업을 진행 중이다. 여성가족부를 주축으로 20개 부처에서 진행하는 '정규직 파트타임제 시범사업'에는 27명의 직원이 참여했다(7월 14일 기준). 고용노동부가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단시간 근로자 채용에 대한 컨설팅을 해주는 사업에는 30곳의 기업이 응했지만 아직 신규 고용까지 간 경우는 한 건도 없다. 한국에서는 유연근무제가 말 그대로 걸음마 단계에 있는 것이다.

◆실제 도입하면 노사 만족도 높아

일부 기업은 유연근무제 도입을 두고 노사 간, 노·노 간 진통을 겪었다.

'시차출퇴근제' 도입을 논의 중인 A보험사는 CEO를 비롯한 임원진은 이 제도에 찬성하지만, 노조측이 반대해 조율하는 절차를 밟고 있다. 노조측은 "일부 직원에게만 혜택이 돌아가는 제도다" "업무 특성상 시차출퇴근제를 할 수 없는 직군에 대해 금전적 보상이 돌아가야 한다"며 반대하고 있다.

회사 입장에서는 풀타임으로 일하는 직원과 유연근무제를 쓰는 직원 간 대우에 차이를 둬야 한다는 부담도 있다. 대웅제약 관계자는 "재택근무를 도입할 때, 아무래도 집에서 일하는 경우 업무 시간이나 효율에서 차이가 있다는 직원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월급은 본봉의 80%만 주는 데 합의했다"고 말했다.

정부와 기업에 유연근무제를 컨설팅하는 한국우리누리재단 임주리 대표는 "노사 간, 노·노 간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이후에는 평가체계나 소통 방법 등의 시스템을 약간 수정하는 것만으로 유연근무제를 무리 없이 도입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진통 끝에 실제로 유연근무제를 도입한 회사의 노사 만족도는 높은 편인 것으로 나타났다. 여성가족부가 최근 가족친화기업 29곳의 인사담당자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참석자들은 "유연근무제 도입 초기에는 우려가 컸지만, 실제로 시행해보니 만족도가 높았다"고 말했다. 한국IBM이 2005년 재택근무제 도입에 앞서 6개월간의 시범사업에 참여한 직원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직원의 95%는 '재택근무에 만족한다'고 답했고 관리자의 87%도 '만족한다'고 답했다.

여성가족부 김숙자 가족정책과장은 "유럽 국가들은 모두 경제성장 과정에서 나타난 실업난을 '파트타임제'로 극복했다"며 "퍼플잡 확산을 위해서는 평가체계를 개선하고 직무를 명확히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퍼플잡 (purple job·유연근무제)

빨강과 파랑을 섞으면 보라색이 나오듯, 정규직·비정규직이란 이분법적 사고를 뛰어넘는 다양한 근무 형태 일자리. ▲시간제 근무 ▲탄력근무(출퇴근 시간 조정) ▲주2~3일 근무 등의 형태가 있다.

[['퍼플잡'이 일자리를 늘린다] 인사이드 ☞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