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파괴. 제12회 농심배 국가대표선발전 무대 도처에서 '하극상'이 펼쳐진 한 주였다. 프로생활 5년 동안 '은둔'해 오던 랭킹 41위 박승화(21) 四단이 기라성같은 톱스타들을 제치고 대표로 뽑혔다.
'연구생 정년퇴출'의 아픔을 딛고 늦깎이 프로가 됐던 강창배(24) 二단과, 랭킹 126위의 여류기사 박지연(19) 二단은 뭇 고수들을 줄줄이 돌려세우며 마지막 결승까지 오르는 파란을 연출했다.
농심배 대표가 되기 위해 필요한 승수는 최소 5승에서 6승 사이. 박승화는 "처음엔 오를 수 있는 나무가 아니란 생각에 대진표도 안 보고 연습바둑 두는 기분으로 나갔다"고 했다. 한 판, 한 판 이기다 보니 자신도 놀랄 만큼 기세를 타게 되더라는 것. '무심(無心)타법'이 홈런을 만들어낸 격이다.
박승화는 지난 한 해 동안 10승 15패로 철저한 슬럼프에 시달렸던 터라 더욱 화제가 됐다. 이창호를 탈락시킨 박정상과의 준결승이 최대고비였다. "힘을 빼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그는 "농심배 본선에 나가서도 단 1승만 거둔다는 마음으로 담담히 임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박지연은 태풍같은 7월을 보냈다. 아시안게임 여자대표 선발전서 1승 차로 탈락한 다음 날 "눈물도 안 마른 상태"로 농심배 선발전에 참가했다. 전혀 기대를 안 했건만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류동완 홍장식 김일환에 이어 김영삼에 이르는 뭇 고수들을 잇달아 눕힌 것. 박지은(2003년)에 이어 사상 두번째 여성 농심배 대표 탄생이 눈앞에 어른거리자 비로소 욕심이 발동했다.
그 결과 결승서 기어코 박승화에게 발목을 잡혔다. 그녀는 "두 대회 모두 내 능력 이상으로 올라갔으므로 여한은 없다"면서 "정말 좋은 경험을 한 셈"이라고 자위했다. 그러나 "빠른 시일 안에 50위권 안에 들겠다"는 말로 랭킹에 대한 반발심(?)도 빠뜨리지 않았다.
강창배의 경우는 이번 하극상 시리즈의 가장 '비극적인 엔딩'에 해당했다. 황원준 박영훈 윤지희 이원도 김진우를 잇달아 베고 올라간 강창배가 최철한과 마주 앉자 인터넷 중계창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랭킹 3위 최철한이 한때 고전의 늪을 헤매자 흥분한 팬들은 34위 강창배를 일방적으로 응원했다.
'약자'에 대한 배려만은 아니었다. 20번도 넘는 입단대회 낙방으로 같은 또래들이 도전무대를 넘나들던 22세 때 프로가 된 강창배의 이력을 알기 때문이었다. "늦게 출발해 힘들 것으로 봤는데 요즘엔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힘들 때마다 막막했던 아마추어 시절을 떠올리며 정진하겠다." 국가대표 자리를 눈앞에서 놓친 강창배의 소감이다.
주최 측은 강자들의 편중을 막기 위해 최상위 랭커 16명을 4개조에 분산배치했는데도 스타기사들의 '떼죽음' 사태가 발생했다. 선발된 이세돌 최철한 목진석 박승화 등 4명 외에 주최측이 나머지 1명을 와일드카드로 지명할 예정. 박영훈 박정환 강동윤 허영호 김지석 등 호화 멤버가 기다리고 있지만 이번에도 '농심배 수호신' 이창호가 선택될 공산이 높다.
'랭킹파괴', '순위 하극상'은 농심배만이 일이 아니다. 바둑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다. 랭킹 50위의 몸으로 올해 초 이창호와 국수위를 놓고 겨뤘던 홍기표(21) 四단, 같은 대회 준결승에 오르면서 85위에서 76위로 점프했던 주형욱(26) 五단, 6월 이후 파죽의 12연승으로 '신분 상승'을 거듭 중인 26위 이춘규(21) 三단 등 '혁명아'들은 부지기수다.
이런 현상은 기사들의 실력이 상·하위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극미한 차로 접근했음을 말해 준다. '하극상 바람'이 갈수록 거세지면서 이제는 10위권 이내 특A급 강자들이 한참 아래 랭커들을 만나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시대에 돌입했다. 젊은 기사들의 의욕과 공부량에 따라 판도가 요동치면서 팬들의 관전재미도 더욱 높아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