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열 기자 krchung@chosun.com

경기도 고양시에 사는 손택수(40· 사진) 시인은 주말이면 동네 앞 주말농장을 찾는다. 함께 농장에 다니는 장철문 시인이 예쁘게 피어난 감자꽃을 자꾸 따자 손 시인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철문 형, 꽃 예쁜데 왜 따우?" 장 시인이 대답했다. "사람이나 감자나 너무 오래 꽃을 피우면 알이 튼실하지 않은 법이여. 꽃에 신경 쓰느라 감자 알이 굵어지지 않는단 말이다."

열매를 품은 꽃은 시들어야 한다. 자기애(自己愛)가 클수록 품고 있는 열매에 나눠줄 정성이 줄어드는 것을 아는 생명의 섭리가 그리 하라고 시키기 때문이다. 사람도 다를 게 없다. '꽃 핀 마음 뚜욱 뚝 끊어낸다/ 꽃시절 한창일 나이에 일찍 어미가 된 내 어머니도/ 눈 질끈 감고 아까운 꽃 다 꺾어냈으리라/ 조카 애가 생기고 나선 누이도/ 화장품 값 옷값을 말없이 줄여갔으리라/ 토실토실 잘 익은 딸애를 등에 업고/ 형이 감자꽃을 딴다/'('감자꽃을 따다' 일부)

손택수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나무의 수사학'(실천문학사)에 실린 62편의 시는 아이의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어머니의 손을 닮았다. 그의 시는 할머니와 어머니가 베푼 모성(母性)에 대한 기억에서 비롯된다. 시인의 어린 시절, 어머니가 딱딱한 생선뼈를 씹어 입에 넣어줄 때 함께 먹은 어머니의 침도 그런 기억의 매개물이다. 어머니는 이제 생선뼈 대신 아들이 발표한 시집 책장을 넘기는 손끝에 침을 적신다. '책 앞에서 침이 고이는 건/ 종이귀신을 아들로 둔 어머니의 쓸쓸한 버릇/(…)/ 내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던 그 침/ 페이지 페이지 얼룩이 되어 있네'(수록시 '육친')

손 시인은 30년 넘게 살던 부산을 떠나 6년 전 서울로 올라왔다. '나무의 수사학' 연작은 자신의 경험을 '정착을 위해 분투하는 생명들'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한 작품들이다. 그런데 그 관심의 정체는 '꽃 피는 벚나무의 괴로움을 나는/ 부끄러움 때문이라 생각한다'는 시 '나무의 수사학 3'에서 드러나듯, 꽃처럼 화려한 성과를 향한 박수가 아니다. 오히려 꽃을 피울 때까지 도심의 매연을 견디느라 나무가 겪었을 불편과 고통을 어루만지는 위로를 주고 싶어한다.

꽃을 볼 수 있는 눈[目]보다 예민한 귀[耳]를 원하는 것도 신음하는 나무를 찾아내 위로하고 싶기 때문이다. '제 살아온 내력을 들여다보고 싶을 때/ 바늘잎 하나 가만히 내려놓는 나무가 있다면/ 그 아래 연못 같은 귀를 파고/ 떨어지는 바늘잎 하나/ 품어보고 싶다'(수록시 '松韻').

나를 드러내기보다 남의 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은 '어딘가로 번지기 위해선 색을 흐릴 줄 알아야 한다'(수록시 '수채')며 자신을 지워 다른 색과 어울리는 수채화적 삶을 살겠다는 다짐으로 이어진다. 문학평론가 박수연씨는 "흐려지지만 지워지지 않는 세계가 있다는 것, 그것이 주체와 타자에 대한 그의 시적 사유"라고 손택수 시 세계의 특징을 정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