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를 친일(親日)과 반일(反日)의 이분법을 넘어선 '식민지 근대'로 파악할 것을 주장해온 윤해동(51) 성균관대 HK교수가 식민지에도 공적 영역이 있었고, 공공의 이익을 위해 벌인 사회운동이 있었음을 분석한 책 '식민지 공공성'(책과함께)을 최근 펴냈다. 지난 2003년 출간한 저서 '식민지의 회색지대'(역사비평사)에서 '식민지 공공성'이란 개념을 학계에 처음 제시했던 윤 교수는 이번 책에서 그의 관점에 공감하는 한국과 일본의 소장 학자 12명이 쓴 논문을 함께 엮었다. 황병주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김영미 국민대 교수, 서재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나미키 마사히토 일본 페리스여학원대 교수 등이 참여했다.

윤 교수는 "'식민지 공공성'이란 식민당국에 대한 저항과 협력이 교차하는 지점에 존재하는 것이며, 일제시대의 행정기관 이전 반대운동처럼 공공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벌이는 일상의 정치적인 측면"이라고 정의했다. 그에 따르면, 1920년대 후반부터 충남 공주에서 벌어진 충남도청 이전 반대 운동은 '식민지 공공성'의 좋은 사례다. 유서 깊은 공주에서 신생도시 대전으로 충남도청을 이전하려는 총독부 계획에 공주지역 주민들은 진정(陳情)이나 시위의 방법으로 반대운동을 펼쳤다. 이 운동에 일본인·조선인이라는 민족 구별은 없었으며, 지역 유지 및 상공인들이 일본 정계의 유력자까지 끌어들이면서 총독부를 괴롭혔다는 것이다. 윤 교수는 "이 운동은 당시 조선인들의 경제와 사회생활 일상에서 벌어진 중요한 운동이었다"며 "독립운동이 아니니까 의미가 없다고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윤해동 교수는“‘식민지 공공성’개념에 대한 감정적인 거부감을 넘어서 타당성을 놓고 논쟁이 활성화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책에 실린 논문 '일제시기 도시의 상수도 문제와 공공성'(김영미)은 식민지 시기 경성지역의 상수도 보급과 관련된 식민당국과 조선인들의 다툼을 다뤘다. 1920~30년대 보급된 상수도의 주요 고객은 일본인들이었다. 우물물과 하천물을 마시던 조선인들은 1920년 콜레라 창궐로 많은 사망자가 나오자 진정서 제출과 언론 기고를 통해 식민당국의 차별적인 상수도 정책을 비판하고 집단행동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수도 혜택의 민족적 차별과 고율의 수도요금 등 경성부의 반(反)공공적 성격을 비판했고, 수도를 둘러싼 주민들의 투쟁은 합법적 저항운동을 발생시키는 중요한 토대가 됐다는 것이다. 논문 '식민지 시기 조선어방송과 식민지 공공성'은 "식민지 시기 조선어방송은 낮에는 내선일체(內鮮一體)의 프로파간다가 행해지면서도 밤 시간이 되면 판소리나 민요 같은 음악이 조선 팔도에 울려 퍼졌다"며 "조선어방송은 식민자와 피식민자의 '타협'의 산물로서 하나의 '식민지 공공영역'으로 존립하고 있었다"고 평가한다.

윤 교수는 '식민지 공공성' 담론이 식민지시기 경제성장에 주목하는 '식민지 근대화론'과 일방적 착취를 강조하는 '수탈론', 양자와 모두 다르다고 선을 그었다. 일부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 제시하는 통계수치 속에는 정치적 차별이 나타나지 않고, 식민지를 야만적이고 특수한 수탈사회로만 보는 것도 실상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윤 교수는 "그동안 식민지 공공성을 개념적으로 많이 연구해왔는데 이제 사례를 가지고 구체화할 생각"이라며 "요즘은 총독부 권력의 성격과 조선인 삶의 관련 등에 관한 자료를 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식민지에도 공공성이 있었다는 주장은 자칫 일제의 식민지배를 미화하게 되는 결과가 되지는 않을까. 이렇게 지적하자 윤해동 교수는 "그런 인식은 오독(誤讀)의 결과다. 강한 정치적 입장만 앞세우면 식민지 전체상을 볼 수 없다. 저항과 협력이 교차하는 회색지대에 살았던 보통 사람들의 삶의 복합성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