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정 월드컵 첫 16강을 이룬 허정무 감독(55)이 연임 포기 기자회견을 하러 서울 방배동 집을 떠난 2일 아침, 허 감독의 부인 최미나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허 감독은 며칠 전 식사를 겸한 가족회의를 거쳐 한국 A대표팀 감독을 그만하는 쪽으로 심경을 정리했다.
16강의 대업을 이루고 온 대표팀 사령탑이 스스로 감독직을 포기하기로 마음 먹은 이유는 뭘까. 가족회의에선 무슨 얘기가 오간 걸까. 부인 최씨는 허 감독이 그만 둘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묻자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최씨는 "두 딸과 사위 모든 가족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그만두는 게 좋겠다는 얘기를 했다. 감독님을 비롯한 가족 모두가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았다"면서 "16강을 이뤘는데 즐거운 지를 모르겠다. 16강을 이뤘는데도 네티즌들이 그만두라고 쓴 댓글을 보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남편이 다시 일을 하고 싶다고 할 때까지 아무 일을 하지 않고 쉬었으면 한다. 하지만 축구를 떠나서는 살 수 없기 때문에 다시 돌아올 것이다"고 말했다.
최씨의 목소리는 그간의 마음고생을 대변하는 듯 무척 가늘고 약했다. 10여분 간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기어들어가는 최씨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수화기에 밀착해야 했다. 한국인 최초로 원정 월드컵 16강을 이룬 명장의 부인에게서 기대했던 목소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마치 큰 잘못을 저지른 뒤 사죄 기자회견장에 남편을 떠나 보낸 사람처럼 약해 보였다. 최씨는 인터뷰 내내 허 감독을 '감독님'과 '아빠' '남편'으로 다르게 불렀다. 극심한 마음 고생의 와중에도 가족들에게 한 번도 내색하지 않고 잘 버티면서 16강을 달성한 남편을 존경하는 마음이 뚝뚝 묻어났다.
-왜 그만 두는 쪽으로 결정을 하셨나요.
▶너무 힘들어서 그만 두라고 만류했습니다. 저희도 대표팀 감독이 이렇게 힘들다는 걸 새삼 느꼈어요. 지난 2007년 12월에 너무 급하게 대표팀 감독 자리를 맡았어요. 그 후 애들도 상처를 많이 받았고요. 아빠(허정무 감독)도 쉴 때가 됐어요.
-며칠 전 가족회의에서 감독님의 거취를 정한 것으로 아는데요.
▶네. 돌아오고 나서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얘기를 나눴습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말을 꺼내서 얘기를 했는데 우리 딸들이 아빠가 쉬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모두가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았어요. 가족들이 모두 만류한 셈입니다. 국민이 염원한 원정 16강을 이뤘는데 즐거운 지를 모르겠어요.
-큰 일을 해내고 바로 그만두는 건 좀 이해하기 힘든데.
▶감독님께선 평생의 꿈인 월드컵 16강을 이뤘습니다. 우루과이전에서 아쉽게 지면서 8강에 오르지 못한 미련이 남아 있습니다. 물론 아쉽지요. 하지만 더 공부가 필요합니다.
-한국인 중 누구도 못한 일을 했는데도 평가가 야박한 것 같습니다.
▶우리 가족들은 스트레스를 받은 걸 얘기라도 합니다. 그런데 아빠는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표현을 하지 않아요. 서운한 점이 왜 없겠어요. 16강을 달성했는데도 일부 네티즌은 그만두라는 좋지 않을 글을 올립니다. 그만두기로 결심했다는 보도가 나오니까 이제서야 다시 하라는 글이 올라오더군요. 너무 어수선합니다.
-그럼 허 감독은 당분간 일을 하지 않는 건가요.
▶아마 그럴 겁니다. 가족 모두가 감독님에게 지금은 재충전이 필요한 시간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일을 하지 않을 겁니다.
-언제 다시 일을 하게 됩니까.
▶본인이 "아, 저건 한 번 해보고 싶다"고 할 때 일을 다시 할 겁니다. 아직 못다한 꿈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축구판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