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를 둘러싼 중국과의 역사분쟁은 평행선을 달리며 어느덧 '백년전쟁'의 양상을 띠고 있다. 지난 몇 년 사이 한국에서 고구려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전문가도 많이 양성됐다. 그리고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한강유역의 고구려 요새는 한국 고고학계의 꾸준한 관심이 되고 있다. 하지만 남한의 고구려 유적은 5세기경 고구려가 백제·신라와 대적했던 군사유적뿐이라 다양한 고구려의 모습을 보여주기에는 부족하다는 한계가 있다.
고구려의 진짜 모습 중에서 우리가 흘려버리고 있는 것은 고구려와 북방 유라시아의 관계다. 고구려는 모용선비와 싸우던 때인 서기 3~4세기경에 금속제 등자(발을 걸어 말에 타는 도구)를 도입했고, 이후 고구려 등자는 당시 알타이와 몽골에서 제국을 이루고 있던 유연(柔然)으로 전수됐다. '미스터리의 국가'라고도 불리는 유연은 돌궐에 쫓겨 동유럽으로 도망갔다. 이들은 서양사에서 '아바르'라고 불리는 집단이 되었고, 그들에 의해 유럽에 등자가 도입됐다.
유럽의 중세사를 바꾼 등자가 극동에서 기원했다는 것은 1970년대 이후 러시아학계의 정설이 됐다. 몇 년 전만 해도 동유럽 학자들은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지만, 요즘은 고구려에 대한 관심도 많고 그 가능성도 충분히 인정하고 있다. 등자뿐이 아니었다. 고구려는 유라시아의 여러 국가들과 능란한 외교술을 펼치며 중국과 주변지역에 대항하여 강력한 국가를 이루었다. 월드컵 1차전의 승리를 지켜보면서 한국 축구가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제·스포츠에 이어 이제 유라시아를 아울렀던 우리 역사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날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