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스페인 전역에선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라'는 피켓을 든 공무원들이 거리로 몰려나왔다. 정부가 최근 발표한 ▲공무원 임금 5% 삭감 ▲올해 연금 지급액 동결 ▲출산 장려금 폐지 등 150억 유로 재정 긴축안에 대한 반발 파업 시위였다. 2004년 좌파 사회당 정권이 들어선 이래 파업이 일어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날 하루 병원과 학교는 문을 닫았고, 철도를 비롯한 공공 교통 운행도 차질을 빚었다.

시위를 접한 일반 시민들의 시선은 대체로 곱지 않았다. 12일 마드리드에서 만난 카를로스(Carlos·71)씨도 그 중 하나였다. "민주노총(CCOO)과 노동자총연맹(UGT)은 공무원 노조 75%가 참여했다고 하지만 정부 집계로는 11% 만이 참여했습니다. 제 주위에도 '공무원 노조 주장이 옳지 않다'라고 고백하는 공무원들이 적지 않습니다."

전통적으로 사회당 지지율이 낮은 지역인 마드리드 시민들이 정부의 방침을 지지하는 것은 매우 예외적인 현상이다. 그만큼 지금 스페인 국민들은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11일 중도성향 스페인 일간지 '엘 페리오디코(El Periodico)'가 '정부가 올해 7월 실시하기로 한 부가가치세 인상 시기를 앞당겨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놓고 시행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79%가 '그렇다'고 답변했다.

스페인의 2대 공무원 노조인 민주노총(CCOO)과 노동자총연맹(UGT) 소속 근로자들이 지난 8일 수도 마드리드에서 정부의 재정긴축안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스페인은 재정적자가 국내총생산의 12%에 달하고 경제성장률이 10년 만에 최저를 기록했다.

◆과다 공공지출의 그늘

사회당이 2004년에 이어 2008년 총선에서도 승리하면서 연임하고 있는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 사파테로(Zapatero) 총리는 2년여 전부터 악화된 경제 위기 상황 내내 "내 정부는 절대 노동자들이 위기의 대가를 치르지 않도록 하겠다"고 선언했었다. 경제를 위해 삶의 질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는 당의 노선을 고수한 것이다.

실제로 스페인 국회는 남유럽 발(發) 금융위기가 터진 상황에서도 퇴직 근로자 외 자영업을 하다가 폐업한 사람들에게도 일정 기간 매달 800~1000유로(120만~150만원)를 지급하는 법안을 최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사회당 집권 이후 공무원 숫자는 꾸준히 늘어 현재 양대 노총에 가입된 공무원 수만 250만명이 넘는다. 인구 4049만명(2008년)인 스페인에 인구 4977만명인 한국의 공무원 수(97만명, 2009년)보다 2배 이상 많은 공무원이 존재하는 셈이다. 국립병원 치료도 전액 무상이다.

정부가 거대한 공공 지출비를 짊어지고 가는 사이 스페인 경제 지표는 바닥을 향해 갔다. 재정 적자는 국내총생산의 12%, 경제성장률은 10년 만에 최악인 마이너스 3.6%로 떨어졌다.

◆청년 둘 중 하나는 백수

경제 위기는 국민들 삶에 직접적인 파장을 미쳤다. 대학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전공하고 아일랜드에 2년간 유학을 다녀온 미겔 마르티네스(Martinez·30)씨는 몇 달간 구직 활동을 하다가 최근 전공과 직접적인 상관이 없는 웹 디자인 관련 일자리를 얻었다. 시간제 계약직이었지만 주변에선 "축하한다"고 파티를 열어줬다. 그 역시 "일자리가 워낙 없어서 이 정도면 감지덕지"라며, "주변에 일이 없어 노는 친구들이 숱하다"고 했다. 실제로 스페인 실업자 500만 가운데 상당수가 '청년 백수'다. 전체 실업률 20%에 청년 실업률은 40% 이상으로, 청년 둘 가운데 거의 한 명꼴이 무직자다.

마드리드를 관통하는 빠세오 데 라 까스떼야나(Paseo de la Castellana) 대로(大路) 고층빌딩에는 유리창에 '사무실 임대'라고 쓰인 간판들이 붙어 있다. 국방부 등 정부종합청사와 레알 마드리드 구장 같은 각종 주요 기관과 금융권이 밀집한 이 지역 건물에 공공연하게 사무실 임대광고를 내거는 일은 그동안 암묵적 금기 사항이었다. 이곳에서 약 500m 남짓 떨어진 알바라도(Alvarado) 지하철 역까지 걸어가는 동안 문을 닫은 점포가 수시로 눈에 들어왔다. '폐업일까지 50% 정리 세일'이라는 광고들도 눈에 띄었다.

한때 '스페인 드림'을 품고 이곳에 온 중·남미 노동자들도 일자리를 잃으면서 하나 둘 본국으로 돌아가거나, 직장을 잃은 채 사회 불만세력이 되고 있다. 건설업을 하던 페루 출신 후안 빠블로 루나(Luna·33)씨도 스페인 건설 업계 거품이 빠지고 경제가 악화되면서 직장을 잃고 지금은 전단지 붙이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한다. 그는 "페루 노동자 10명 가운데 4명은 스페인을 떠났다"며 "이제 스페인은 '기회의 땅'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중남미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베이아스 비스타스(Bellas Vistas) 동네 재래시장에서 채소 가게를 하는 에콰도르인 곤살로 아스깐따(Ascanta·30)씨는 "에콰도르 이민자 40만 가운데 최근 1년 새 1만5000명이 돌아갔다"고 했다.

◆개혁 칼 빼든 좌파 정부

이런 상황에도 스페인 정부는 최근까지 "스페인 위기는 과장됐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하지만 눈앞에 드러난 객관적 증거는 번번이 정부의 주장을 뒤엎었다. 사파테로 총리가 "스페인 현실은 해외 언론이 다루는 정도로 심각하지 않다"고 한 다음날, 세계 3대 신용평가사 가운데 하나인 피치가 2003년 이래 변함없던 스페인 국가 신용등급을 AAA에서 AA+로 낮췄다. 스페인 정부가 지난달 자금 조달을 위해 발행한 국채는 입찰 수요나 발행 규모가 기대에 못 미치고 발행 금리도 최고치를 기록해 '사실상 실패한 국채 발행'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50억 유로 긴축 재정은 정부의 마지막 돌파구였다. 카르멘(Carmen·66)씨는 "국민들 스스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다른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