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 당선자는 이번 지방선거의 최대 스타 가운데 한 명이 됐다.
안 당선자는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왼팔, 노무현의 그림자에서 마침내 홀로서기에 성공했다. 그것도 민주당이 드동안 한번도 배출한 역사가 없는 충남도백의 자리에 올랐다.
그의 당선은 그러나 단순히 광역단체장 한 자리를 맡게 된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정치권은 앞으로 그의 행보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 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대통령 노무현을 만든 1등 공신이었음에도 개인적으로는 한 번도 이렇다할 직함을 갖지 못했던 비운의 정치인에서 충남지사 당선을 통해 화려한 비상을 꿈꿀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 굴곡의 유년기
안 당선자는 1964년 10월 28일 충남 논산군 연무읍 마산리에서 2남 3녀중 셋째로 태어났다.
안 당선자의 조부는 강경 포구에서 객주점을 하면서 상당한 재산을 모은 부자였는데 가세가 점점 기울어 선친이 땅을 처분하고 마산리로 옮겨오면서 논산에 자리를 잡게 됐다.
선친은 마산리에서 철물점을 열었고 시골마을의 유일한 만물상으로 가게살림은 넉넉한 편이었다. 안 후보의 유년기 추억이란 여느 촌놈처럼 특별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고등학교를 잠시 다닐 때까지 늘 반장을 했다. 초등학교, 중학교 때는 학생회장도 맡았다. 이후 안 당선자는 대전으로 유학해 소위 뺑뺑이 2기로 남대전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전두환 정권 시절이던 고등학교 재학중 안 후보는 5․18 광주민주화항쟁과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 등에 대한 의문을 품었다는 이유로 계엄사에 끌려가게 된다.
굴절된 역사와 세상에 대한 의문이 많았던 안 당선자는 부모의 만류를 무릅쓰고 입학 6개월만에 고등학교를 중퇴하게 되고 책가방엔 교과서 대신 각종 사회과학서적을 섭렵하면서 세상을 보는 시야를 키우게 된다. 이후 그는 1982년 검정고시를 거쳐 이듬해 1983년 고려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한다.
◇ 세상에 대한 관심
머리가 비상했던 그는 의외로 쉽게(?) 대학에 입학한 뒤 자연스레 운동권에 몸담게 된다. 이즈음 가세는 몰락해 서울의 조그만 단칸방에서 온 식구가 살아야 하는 어려움도 겪게 된다.
안 당선자는 고려대 내에 존재하던 14개 서클을 통합한 '애국학생회'를 조직하는 등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의 초석을 놓는데 큰 역할을 하면서 운동권의 대부로 자리매김 했고 반미청년회 사건으로 안기부에 끌려가 투옥된다.
이후 안 당선자는 89년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의 비서실장이던 김덕룡 의원과 일하면서 정계에 진출했다. 그러다 1990년 1월 삼당합당이 일어났다.
노무현 등 7인이 3당 합당을 거부했고 김덕룡 의원실을 나오게 된다. 안 후보를 포함한 당직자 18인이 잔류를 택하면서 이른바 꼬마 민주당이 탄생했다.
하지만 이시기 안 당선자는 정치권을 오가기도 했지만 한국정당정치에 회의를 품고 출판사 영업부장을 하기도 한다.
그러다 '정치인 안희정'을 담금질한 것은 94년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하면서부터다.
노무 현의 오른팔로 불리면서 이번 선거에서 강원도지사로 뽑힌 이광재 당선자가 노무현 의원을 도와 연구소를 해보자는 권유에 합류를 결정하고 이후 노 대통령과의 인연을 이어간다.
◇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다
안 당선자는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만든 일등공신이었다. 후에 노대통령은 그를 "정치적 동지"라고까지 불렀다. 그의 자서전 출판을 기념하는 동영상을 촬영하면서 노 전대통령이 울음을 쏟은 것이 뒤늦게 알려지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안 당선자에 대해 "안희정씨는 유능한 사람"이라며, "대통령을 만들어 준 사람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둘 사이엔 언어적 수사를 뛰어넘는 무엇이 있었다. 그 때문에 그의 고난은 이어진다.
실제 참여정부 5년은 그에겐 고난의 세월이었다. 대선 자금 수사로 구속됐다. 참여정부 내내 아무런 공직을 맡지 못했을 뿐 아니라 18대 총선에서는 이 전력이 문제가 돼 공천 심사대상에서 배제되기도 했다.
선거전에서도 이 전력은 상대후보에게 단골 공격메뉴였다. 대신 그는 같은 해 7월 최고위원 경선에서 당선돼 당당히 재기했다.
이 당시 노 전 대통령에 대한 당내 평가는 썩 좋지는 않았지만 그는 경선 내내 노 전 대통령의 가치와 철학을 홍보했다. 그가 `원칙과 소신의 정치인'으로 불리는 이유다.
그는 또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공격이 극에 달했던 2007년에 참여정부평가포럼을 이끌며 참여정부에 대한 공격에 온몸으로 맞섰다. 그가 이번에 충남도지사에 도전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른바 `민주정부 10년'을 노 전대통령을 대신해 다시 평가받겠다는 것이다.
◇ 향후 행보 촉각
안 후보는 연초 충남지사 출마를 공식화했다.
하지만 열린우리당 시절의 모든 조직이 사실상 와해된 상태에서 도전 자체에 의미가 있다는 세간의 평가가 많은 것이 사실이었다.
참여정부와 노무현 정신을 계승한다는 선언적 의미일 뿐 과거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처럼 당선가능성은 회의적이었다.
또 캠프의 핵심이던 윤원철 전 청와대 행정관이 지난4월 알선수재 혐의로 재수감되면서 선거전에 먹구름이 끼는 등 위기가 찾아오기도 했다.
마땅한 조직도 없이 그는 출마선언 전까지 충남 16개 시군을 4바퀴 이상 돌면서 표밭을 다졌다. 지역균형발전과 세종시 사수 등을 내세우면서 참여정부 시절부터 이어온 지역주의 타파를 전면에 내세웠다.
오랜 정치활동에 집권경험, 학습으로 단련된 그는 유세에서 때론 눈물을 쏟을 만큼 열정적인 선거전을 치렀다.
안 당선자는 선거기간 내내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 이후 충남의 새로운 대표가 되겠다, 2인자 정치를 청산하고 대한민국을 이끄는 지도자로 키워달라"며 지지를 호소해 마침내 도민의 선택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
이번 승리로 안 당선자는 더 큰 도전을 위한 중요한 발판을 마련했다. 더 큰 도전이 무엇일지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