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반독재 투쟁과 1980년 5월 광주항쟁의 대표적 유적 가운데 유일하게 본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신광교회(광주공원에서 향교 쪽으로 오르는 길 옆)가 헐릴 위기를 맞았다.

5·18 당시 학생들은 진압병력에 맞서 투석전을 벌이다 세에 밀려 쫓기면서 무려 7m가 넘는 절벽을 기어올라가 철책을 넘어 신광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학생들은 바닥의 블록을 깨서 중앙로로 추격해온 병력과 치열하게 대치했다.

그때 곳곳에 구부러진 철책이 그 모습 그대로 지금도 남아 있어 30년 전 격전의 현장임을 증언하고 있다. 또 뜰에 있던 블록이 모두 사라진 탓에 지금도 신광교회의 마당에는 블록이 없다.

이 철책 옆에 류동운(1961~1980) 열사의 기념비가 오래된 석류나무 아래에 서 있다. 당시 한신대 2학년이던 류 열사는 이 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던 류연창 목사의 아들. 그는 전남도청을 사수하다 26일 외출해 '나는 이 병든 역사를 위해 갑니다. 이 역사를 위해 한줌의 재로 변합니다. 이름 없는 강물에 띄워주시오'라는 일기를 남기고 다시 전남도청으로 돌아가 27일 새벽 공수부대의 총탄에 숨졌다.

추모비의 바로 맞은편 건물은 1970년대 암울한 유신독재에 맞서서 아버지 류 목사가 장준하 선생 등을 초빙해 고(故) 윤한봉씨 등 광주의 젊은이들에게 민주의식을 일깨우던 사택이 있던 자리다.

그러나 최근 수립된 공원계획에 의해 신광교회가 풍암지구로 이전하게 되자, 이 모든 흔적과 이야기들이 소리 없이 지워질 위기에 놓였다.

이에 대해 양림동을 중심으로 한 민주인사들은 5·18과 6·10항쟁의 주요 유적인 신광교회를 보전해야 한다며 대책을 모색하고 있다.

이들은 특히 1970년대 유신독재에 맞서 싸우던 도심의 보루였던 대의동 광주YWCA회관, 금남로 광주YMCA회관, 기장양림교회 등이 모두 없어지거나 외관이 변형된 데 비해 신광교회는 수십년 동안 그대로 남아 있다며 교회이전과 함께 이 공간을 민주·인권 관련 공간으로 리모델링, 활용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송인동 호남신학대교수는 "1980년 첫 시민군이 결성된 현장의 스토리텔링 자료를 갖추거나, 1970년대 광주의 청년들에게 민주·인권교육을 했던 현장임을 되살려 광주 민주·인권운동 관련 각종 자료를 전시할 수 있을 것"이라며 "광주 의병과 3·1만세운동, 광주학생독립운동 등이 바로 신광교회가 있는 언덕과 근접한 거리에서 전개됐던 역사 이야기들은 시너지효과를 거둬, '의향 광주'의 실감나는 발자취 하나를 보전할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한편, '양림의오월추념위원회'(위원장 송인동)는 5·18 30주년을 맞아, 류 열사의 이야기를 포함한 양림동 일대의 5·18 관련 역사와 인물들을 담은 사진이야기전(양림의 오월)을 열었다. 전시는 26~30일 양림·진월동 등 푸른길공원 일대에서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