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오전 전남 구례군 간전면 '제다(製茶·차나무 잎으로 음료를 만드는 것) 체험장' 165㎡(50여평)는 은은한 녹차향으로 가득했다. 혜우(慧宇·57) 스님이 차를 재배하는 농민들에게 "'짜작짜작' 소리가 날 때까지 찻잎을 덖어야 합니다"고 말했다. 덖는다는 말은 곡식을 자체 수분으로 익히는 것을 이른다. 솥을 둘러싼 농민 15명이 "아, 그 소리?"하며 저마다 아는 체했다. 체험장 안 솥과 건조기, 덖은 잎을 비비는 '유념(柔捻)'을 위해 깔아놓은 멍석이 온통 녹차 빛깔이었다.
섬진강변과 화개장터 사이 이곳은 혜우 스님의 차 만드는 법 전수장이다. 20년간 제다법을 연구한 혜우 스님은 2005년부터 차 농가와 일반인에게 녹차 교육을 하며 '보시(布施)'를 실천하고 있다. 스님은 2005년부터 전남 순천 섬진강변 한 폐교(廢校)를 순천시에 연간 1000만원씩 내고 임차해 제다를 가르치다, 자금 부담이 커서 올 초 녹차공장을 개조한 이곳 제다 체험장으로 옮겼다.
녹차는 찻잎을 솥에서 덖고 비비며 건조하는 과정을 수차례 거듭해 만든다. 찻잎 따는 법부터 깊은 향을 우려내는 작업까지 스님이 모두 가르쳐준다.
"스님, 솥의 온도는 어떻게 맞춥니까?" 경기도 일산에서 작년 말 귀농(歸農)한 권수한(58)씨가 묻자 스님은 "솥에 뿌린 물이 돌아다니지 않고 동그랗게 모여 놀면 그게 250~300도 정도입니다. 그게 '첫덖음 온도'입니다"며 시범을 보였다. 열심히 메모하던 권씨는 "집에서 프라이팬에다 찻잎을 덖어 봤는데 모두 실패했다"며 "노후에 차 재배를 해보려고 스님을 찾아왔다"고 했다.
혜우 스님이 차(茶)에 관심 갖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중반 전남 보성의 작은 암자에 머물 때 새 한 쌍이 둥지 짓는 모습을 보면서부터였다. 그는 "새들도 스스로 집을 짓는데 내 주변은 온통 남의 손을 빌린 것 천지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때부터 좋아하는 차만이라도 스스로 만들어 마시기로 마음먹었다"고 했다.
스님은 그 뒤 절에서 내려오던 전통 제다법을 깨치기 위해 전남과 경남 일대 차 재배지를 십수년 유람했다. 스님은 차의 고유한 맛과 향을 내는 '덖음법'을 터득한 뒤에는 농민들을 떠올렸다고 했다.
"수행자는 수행 결과물을 속(俗)으로 돌려야 하는데 내가 가진 게 제다 기술뿐이니 그걸 필요로 하는 농민들에게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했지요."
녹차는 찻잎 따는 시기와 잎 두께에 따라 우전·세작·중작·대작으로 나뉜다. 곡우(穀雨·봄의 마지막 절기) 이전에 따는 우전(雨前)과 잎이 가는 세작(細雀)을 최상품으로 친다. 영세 농민들은 가공 기술이 부족해 고급 찻잎을 생잎 그대로 지인들에게 알음알음 팔아왔다. 덖고 유념해서 찻잎으로 팔면 2~3배까지 가격이 뛴다. 스님은 "제다 기술을 몰라 농민들은 헐값에 차를 팔고 마시는 사람들은 질 낮은 차를 마셔 모두 손해였다"며 "누구나 밥 짓는 법은 알아도 잘 짓는 것은 별개이듯 차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10년째 차 재배를 해온 김영수(58)씨는 "찻잎을 잘 가공해서 좋은 가격으로 파는 게 농가들의 소망"이라며 "덖는 온도와 시간까지 배우면서 직접 실습해보긴 처음"이라고 했다. 차 재배업자인 한정규(41)씨는 "수십년씩 차를 재배한 농민들도 제다법을 배운 적이 없이 차맛도 모른 채 차를 만들어 온 게 현실"이라고 했다.
5년간 스님에게서 제다법을 배워간 전국의 농민과 일반인은 3000명이 넘는다. 30여 농가는 스님에게 배운 기술로 자체 브랜드를 만들어 찻잎을 팔고 있다. 하지만 스님은 자신이 만든 차를 시중에 팔지 않는다. 대신 유명 사찰 스님들에게 차를 팔아 번 돈으로 이곳 제다 체험장 임차료를 내고 있다. 스님은 "김치나 된장을 담아서 밑반찬으로 갖고 오는 제자 농민분들이 많다"고 자랑했다.
"농민이 이롭도록 제다 기술을 퍼뜨리는 것도 부처님 뜻을 설파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5시간 실습 동안 속성으로 만든 교육용 녹차가 완성됐다. 다기(茶器)를 꺼내 놓고 둘러앉아 차를 시음하는 농민들 표정이 진지했다. "떫은맛이 있으면서도 구수허네." "이게 진짜 녹차 맛이여? 기술이 좋긴 좋네." 농민들은 저마다 "오늘 돈 벌어간다"며 실습으로 만든 녹찻잎을 챙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