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규홍 의병장

국권회복을 위해 싸운 항일투사 가운데 전라도 익산의 이규홍(李圭弘) 의병장(초상화)을 빼놓을 수 없다. 이규홍은 1881년 익산 관동(지금의 팔봉면 석암리)에서 중추원 의관을 지낸 이기영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기골이 장대하고 성품이 강직하였으며 사람을 포용하는 아량이 있었다. 아버지 이기영은 3천석지기의 대부호였다.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일본에 넘어가게 되자, 1906년 4월 이규홍은 26세의 젊은 나이로 평생동지 박이환, 문형모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되찾자는 의혈동맹을 맺었다. 4월 25일 이들은 태인 무성서원에서 호남의병을 일으킨 최익현과 임병찬 선생을 찾아가 스승의 예를 올린 뒤, 그 휘하에서 싸우기로 맹약하였다. 아들의 결연한 의지를 확인한 아버지 기영공은 "국가의 위기를 맞아 보국의 도리를 다하게 된 내 아들이 자랑스럽다. 가산의 전부라도 바칠 테니 오로지 국가에 헌신하라"며 기만원을 쾌척하였다.

1907년 1월 임병찬이 대마도에서 순국한 최익현의 유해를 안고 귀국하자, 이규홍은 스승을 찾아뵙고 기병을 약정했다. 그는 집에 비축된 곡식과 500두락의 전답을 팔아 의병을 취합하니 각처에서 지사들이 다투어 모였다. 의병은 전주에서 해산된 진위대원 100명을 중심으로 익산·여산 일대의 산포수와 뜻있는 인사들로 구성되었다. 이규홍의 '오하(梧下)일기'에는 모집된 의병이 257명, 서양총 100자루, 한식총 200자루, 연환(鉛丸)이 20여두, 화약이 10여두라고 기록되어 있다.

익산·여산 일대의 산포수

1907년 11월 6일 익산 관동에서 출병식을 할 때 이규홍은 "왜군은 힘으로 싸우지만 우리는 의로써 싸운다. 의는 힘을 이긴다"고 외쳤다. 이규홍 의병군은 용담의 운장산에서 승리를 비는 고천제를 지낸 뒤 11월 15일 가금리전투에서 일군 29명을 사살하였다. 진안·장수·용담을 넘나들며 전투를 하던 중 12월 25일에는 일군 44명을 사살하였다. 1908년에는 진산·금산 등지에서 일본 정규기마부대 600명과 싸워 56명을 없앴다. 그 사이 아군도 85명을 잃었다.

일본군은 이규홍의 목에 4000원의 현상금을 걸고 체포에 혈안이었다. 이규홍은 대덕군 산내면 사한리의 송창재집에 은거하였다. 이를 눈치 챈 일군이 쫓아와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자 1908년 4월 20일 부대를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이날 밤 그는 피눈물을 토하듯이 시 한 수를 지었다.

'칼을 던지고 텅 빈 산에 앉아 있으니/ 흐르는 눈물이 옷을 적시네/ 저 두견새가 내 마음을 헤아려/ 불여귀의 비정을 함께 울어주는구나'

해군(解軍) 이후 숨어 활동하던 이규홍은 1918년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독립청원서를 갖고 파리에 떠나는 김규식에게 1300원의 경비를 지원하였고, 간도에서는 김좌진 장군을 만나 마지막 남은 3000원을 독립군 양성자금으로 출연하였다. 그 후 국내로 들어와 항일운동을 계속하던 이규홍은 1924년 2월 8일 일경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4개월 후 석방되었으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그는 1929년 6월 6일 향년 48세로 눈을 감았다. 지금 익산시의 뜻있는 분들이 이규홍을 비롯한 17의사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