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어느 가을날 아침, 북경 시내 남쪽 채소시장 앞 교차로에 사형수 왕웨이친(王維勤)이 끌려나왔다. 형장에는 처형을 감독하는 형부(刑部) 관리와 함께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병사들은 죄수를 기둥에 묶고 윗옷을 벗겼다. 사형집행인은 가슴 부위부터 시작해 이두박근과 허벅지 살을 차례대로 도려내기 시작했다. 살을 저미는 작업 도중에 왕씨의 심장을 단번에 찔러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팔목과 발목, 다음으로 팔꿈치와 무릎, 마지막으로 어깨와 엉덩이 부분을 잘라냈다. 장의사는 순식간에 30여 조각으로 분리된 왕웨이친의 시신을 모아 공동묘지로 옮겼다. 왕씨는 3년 전 재산분쟁을 빚던 이웃의 일족 12명을 죽인 죄로 청나라의 극형인 '능지처사(凌遲處死)'에 처해졌다.

왕웨이친의 처형 장면은 구경하러 갔던 프랑스 군인들에 의해 사진으로 남았다. 청나라는 그 이듬해인 1905년 '능지처사'를 폐지했다. 그러나 휴대용 사진기라는 최신기술이 포착한 중국의 야만적 형벌은 서구인들의 뇌리에 깊이 남았고, 아시아의 잔혹성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확대 재생산됐다.

19세기 후반 중국 담채화 화첩에 실린 능지형 처형 장면.

이 책은 '능지처사'에 주목한 서구가 중국, 나아가 아시아에 대해 만들어낸 야만적 이미지를 해체한다. 왕웨이친의 처형 사진에서 출발하여 중국 형벌의 역사를 살펴본 뒤 능지형에 대한 서구의 집착과 몰이해를 비판한다. 서구인들이 '천번을 잘라 죽인다(death by a thousand cut)'고 번역한 '능지'는 10세기 요나라에선 사지절단[支解]을 의미하는 형벌이었다. 송나라는 가장 극단적인 범죄를 처벌하기 위해 사형의 한 형태로 능지형을 인정했다. 그러나 형법에서 '능지'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원나라 때였다. 명나라 때는 반역, 부친 살해, 역모, 그리고 잔학행위나 주술 목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의 몸을 난도질하는 행위 등 네 가지 중죄를 저지른 흉악범에게 판결할 수 있는 합법적 형벌이 됐다.

능지형의 목적은 범죄자에게 최대한 고통을 주는 것이었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신체의 절단이었다. 중국인들이 신체적 완전성을 훼손당하는 것을 위협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능지를 뛰어넘을 극형은 없었다. 중국 지식인들은 능지형이 비윤리적이고 모순적이라는 이유로 끊임없이 비판해왔다. '(능지는) 성왕(聖王)의 치세에는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며 '국가의 법이 어찌 도적의 잔인함과 같을 수 있는가'라고 비판한 송대의 육유(陸游)가 대표적이다.

이 책은 '능지'형에 대한 서구의 집착이 또 다른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비판한다. 1928년 런던 '옵저버'지에 실린 기사는 이런 선입견이 만들어낸 사례이다. 상하이 통신원이 썼다는 기사는 공산군이 광둥성에서 마을 주민들에게 저질렀다는 잔학행위를 보고했다. '내장이 제거된 시체들이 며칠 동안 길거리에 버려진 채로 있었고, 개들에게 갈기갈기 찢겨 먹힐 때까지 아무도 그 시체들을 치울 수 없었다…. 처형 직전의 남자들은 적들이 자신의 귀와 살점을 도려내어 튀겨 먹는 것을 직접 보아야 했다.' 그러나 이 기사는 거리에서 떠도는 소문에 '능지'형의 이미지를 보태 살을 붙였다는 것이다.

이 책은 유럽에서도 죄수의 육체를 훼손하고 파괴하는 관행이 중국 못지않게 심각했고, 이런 형벌에 대한 혐오감은 19세기 이후에야 등장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7세기 영국인들은 반역자들을 매달아 놓고 그 육체를 '끌어당기고'(내장을 꺼내고), '4등분하여'(여러 부분으로 잘라서) 처형했다. 몽테스키외는 1748년 '법의 정신'을 쓰면서 중국의 능지형을 비난하지 않았다. 극형에 관한 한, 과거와 현재의 차이가 서구와 아시아의 차이보다 훨씬 더 본질적이라는 얘기다.

이 책은 명나라의 대명률(大明律)을 따랐던 조선에서 능지형이 집행됐을 가능성을 조심스레 얘기한다. '조선왕조실록' DB에서 '능지처사'를 입력하면 320건의 기사가 뜬다. 하지만 한국사 연구자들은 능지처사가 실제로 이뤄지지 않았고, 죄인의 사지를 찢어 죽이는 '거열(車裂)'로 대신한 것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