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아(20ㆍ고려대)를 처음 만난 것은 6년 전이었다. 경기도 군포 도장중 2학년 때였다.
1m56에 38kg(현재 1m64, 47g)으로 바람이라도 불면 날아갈 것 같은 가느다란 요정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어린 나이에 이미 신화의 주인공이었다. 2004년 9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주니어 그랑프리 2차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1908년 스케이팅이 국내에 도입된 이래 피겨 종목에서 국제대회 우승을 차지한 것은 성인과 주니어대회를 통틀어 김연아가 처음이었다.
그 전까지 피겨스케이팅은 다른 나라의 얘기였지만 14세 소녀가 역사의 줄기를 바꾸기 시작했다.
바로 소녀 김연아가 세상에 나온 때다. 해프닝도 많았다. 인터뷰를 할때면 취재진이 애를 먹었다. 질문을 하면 답변이 좀처럼 돌아오질 않았다. "이런 생각이죠? 그럼 이렇게 얘기하면 돼요"라고 답변을 가르쳐 준 것도 모자랐다. 수차례의 'NG'를 거쳐야 '작품'이 나왔다. 물론 지금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김연아는 취재진을 농락(?)하며 자유자재로 얘기 보따리를 술술 푼다.
소녀는 될성 부른 나무였다. 만 14세1개월 만에 코카콜라 체육대상(스포츠조선 제정ㆍ코카콜라 후원) 2004년 9월의 MVP 수상자로 선정됐다. 부천 내동중 3학년때 수상자로 선정된 '탁구황제' 유승민의 최연소 수상 기록도 깼다.
꿈은 그때부터 다부졌다. 소녀 김연아는 "이같은 상을 수상하기는 처음이어서 기쁘다. 올림픽 금메달로 보답하겠다"고 수줍게 말했다. 이듬해 제10회 코카콜라 체육대상(2004년)에서 신인상까지 거머쥐었다.
"어린 나이에 이런 상을 받게 돼 너무 기뻐요. 사실 국제대회에 나간 지도 얼마되지 않았는데 과분한 것 같습니다. 앞으로 더 잘하라는 채찍으로 알고 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 당시 신인상 수상 소감이었다.
그 약속은 곧 지켰다. 2004~2005시즌 주니어 무대를 휩쓴 후 2006~2007시즌 마침내 시니어 무대에 데뷔했다. 첫 단추가 화려했다.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우승하며 성인 무대에서도 본격적인 김연아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2007년 초까지만 해도 그녀는 춥고, 배고팠다. 스케이트 부츠 문제 때문에 은퇴까지 생각했다. 안정적인 훈련도 보장받지 못했다. 당시 동갑내기 아사다 마오의 생활과 비교하면 극과 극이었다. 김연아는 이역만리 캐나다에서 민박집에 기거했다. 비행기 좌석은 이코노미 클래스였다. 반면 아사다는 해외 전지 훈련 때 일등석이 기본이고, 이동할 때도 대형버스를 혼자 타고 다닐 정도였다.
2007년 3월 세계선수권대회를 앞두고 국내 취재진으로는 최초로 캐나다 토론토 크리켓클럽 빙상장을 찾았다. 캐나다에서는 이미 김연아의 일거수일투족이 화제였다. 빙상장 게시판에는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한 김연아의 영문 기사가 스크랩돼 있었다. 하루 일과표도 어지러웠다. 훈련 스케줄로 빼곡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 그녀는 울고 있었다. 부상이 발목을 잡았다. 고질인 허리 통증이 가라앉지 않았다. 발목, 무릎도 좋지 않아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그 결과 세계선수권에서는 쇼트프로그램 1위를 차지했지만, 프리스케이팅에서 3위로 밀렸다. 프리스케이팅 배경 음악이 '종달새의 비상'이었는데 지금도 그 음악만 들으면 아프단다. '그때의 아팠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고 가슴 한구석이 저려온다. 부상으로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연기했기 때문이다.' 김연아가 자전 에세이에서도 밝힌 내용이다.
부상 공포는 2007~2008시즌에도 이어졌다. 그랑프리 파이널까지 잘 나가다 시즌 마지막 대회인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또 다시 3위에 머물렀다. 그래서 올림픽 금메달을 위해 다시 시작했다. 집중적으로 허리 치료에 들어갔다. 체력 훈련의 강도를 높여 진정한 승부수를 던졌다.
땀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2008~2009시즌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정상에 올랐다. 2010년 2월 26일 밴쿠버에서 신화를 창조했다. 2010년 밴쿠버올림픽 시상대의 맨 꼭대기에 섰다.
일곱 살때의 꿈이 13년 만에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점프의 정석'이 되기까지 수만번 뒹군 1800㎡의 차가운 빙판은 그녀를 위한 무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