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역이나 버스터미널 주변에는 낯선 사람들에게 차비 명목으로 상습적으로 돈을 빌려달라는 사람들이 종종 돌아다닌다. 주로 “지갑이나 가방을 잃어버렸는데 집에 갈 차비를 빌려주면 곧 갚겠다”고 접근한다.

많은 인파가 들고나는 교통 요지에서 활동하는 이들은 이른바 ‘남수꾼’으로 불린다. ‘남의 돈을 수거해가는 꾼’이라는 의미다.

◆낯선 사람에게 접근해 돈 빌려 달라는 ‘남수꾼’들

최근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돈을 빌려달라는 할머니에게 ‘당한’ 한 여대생의 경험담이 올라왔다. 서울의 한 지하철 역에서 벌어진 이 일은 80대 노인이 여대생 백모씨에게 접근해 “집에 갈 차비가 없으니 2000원만 빌려 달라”고 한 데서 시작됐다.

측은한 마음에 별 의심 없이 1만원을 꺼내 준 백씨에게 노인은 “휴대폰 번호를 알려주면 꼭 돈을 갚을 테니 만원만 더 달라”고 부탁했다. 1만원을 더 준 백씨는 얼마 뒤 같은 장소에서 이 할머니를 또 만났다. 할머니는 같은 수법으로 또다시 돈을 요구했다. 그제서야 백씨는 할머니의 ‘거짓말’을 눈치채고 할머니에게 따져 차비가 없다는 말이 사실이 아니란 걸 알아냈다.  백씨의 사연은 28만이 넘는 조회 수를 기록했고, 2000개가 넘는 덧글에는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많았다.

실제로 지난 17일 오후 4∼9시까지 5시간 동안 서울 서초구 반포동 서울고속버스터미널에서 관찰해본 결과, 남수꾼에게 피해를 입었다는 사람은 물론이고 남수꾼들의 ‘작업’ 현장까지 목격할 수 있었다.

“내가 아는 남수꾼은 겉보기는 여느 사장님 못지않게 번듯해. 고급 양복에 명함까지 가지고 다니면서 돈을 빌리더라고. 허름한 몰골로 구걸하는 노숙자랑은 차원이 달라. 점잖은 양반이 지갑을 잃어버렸다면서 차비 좀 빌려달라면 사람들이 도와주지 않겠어? 꼭 갚겠다면서 가짜 명함까지 건네준다고. 그런데 그게 다 사기야 사기.”

고속버스 운전사 김모(51)씨는 터미널 대합실에 상주하다시피 하는 남수꾼이 최소 서너 명이며, 뜨내기 남수꾼까지 합치면 훨씬 많을 것이라고 했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근처 분식집에서 선 채로 만두를 먹고 있던 두 남자를 가리키며 “저 사람들이 전문 남수꾼이니, 지켜보고 있으면 돈 빌리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김씨가 지목한 두 남성은 각각 베이지색 점퍼에 검은색 양복바지, 카키색 체크무늬 재킷에 갈색 양복바지 차림이었다. 행색이 특별히 남루하지 않아 보통 터미널 이용객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대화를 주고받으며 요기를 하던 그들은 남남처럼 떨어져 영동선 터미널 대합실로 들어갔다. 베이지색 점퍼 차림의 남성은 대합실을 거쳐 지하상가 쪽으로 내려갔다.

카키색 재킷을 입은 남성은 대합실의 대형 TV 주위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화면을 보는 척 하면서도 수시로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얼마 뒤 승강장에 버스가 도착하자 그는 서서히 대합실 통로 한가운데로 걸어 나갔다. 이윽고 한 20대 남성의 앞길을 막아선 그는 손짓을 해가며 뭔가 열심히 설명했다. 젊은 남성은 이내 뒷주머니 지갑에서 만원짜리 한 장을 꺼내 건넸다. 고맙다는 듯 연방 고개를 끄덕이던 남성은 재킷 주머니를 더듬거리며 뭔가 찾는 시늉을 했다. 돈을 건넨 젊은 남성은 손을 내저으며 승강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돈을 갚겠다며 연락처를 물었으나 사양한 듯한 상황이었다.

돈을 챙기고 나서도 그는 터미널 곳곳의 대합실을 옮겨 다니며 ‘다음 목표’를 찾았다.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할 만큼 순하게 생긴 사람들을 노린다”는 김씨의 말이 떠올랐다. 남성의 두 번째 타깃은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성이었다. 하지만 이 남성이 말을 채 걸기도 전에 지나쳐 버렸다. 그는 중간 중간 화장실에 들르거나 대합실 의자에 놓인 신문을 펼쳐 보며 시간을 보냈다. 이 남성은 두 시간 동안 총 6명의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주로 20∼30대의 젊은층이었다. 이 중 실제로 돈을 건넨 사람은 2명이었다.

기자가 잠시 호남선 대합실을 살펴보고 돌아오는 동안 사라져 버린 이 남성은 오후 8시쯤 지하상가와 연결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다시 등장했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대합실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던 그는 저녁 9시쯤 되자 터미널 밖으로 나갔다. 처음 만두를 먹었던 분식집에서 베이지색 점퍼 차림의 남성과 합류한 그는 꼬치 어묵을 안주 삼아 소주잔을 기울였다.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시던 그들은 비틀비틀 어두운 거리로 자취를 감췄다.

◆동정심 이용한 사기...걸인보다 뻔뻔해

서울고속버스터미널에서 5년째 매점을 운영하는 노정숙(54) 씨는 “남수꾼들이 남의 동정심을 가지고 사기를 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나이나 성별도 제각각이어서 멀쩡하게 생긴 젊은 여성들이 돈을 빌리고 다니는 모습도 볼 수 있다고 했다.

“한번은 집이 안양이라는 젊은 아가씨가 핸드백을 도둑맞아서 차비가 없다고 나한테 5000원을 꿔갔어. 그런데 가만 보니 그 아가씨가 집에는 안 가고 어떤 중년부부한테 또 돈을 빌리더라고. 마침 그 부부가 우리 가게에 들렀기에 얼마를 빌려 줬느냐고 물어봤지. ‘5000원을 줬는데 그 돈으로는 인천까지 못 갈테니 1만원쯤 더 줄 걸 그랬다’고 오히려 미안해하는 거야. 그 부부한테는 집이 인천이라고 했나봐.”

근처에서 테이크아웃 커피점을 운영하는 윤모(58) 씨도 남수꾼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처음 한두 번은 사정이 딱해 돈을 쥐어주곤 했지만, 상습적으로 돈을 빌리고 다닌다는 것을 안 뒤로는 절대 도와주지 않는다”며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 직접 끊어준 차표를 환불해 가는 경우까지 봤다”고 했다.

남수꾼들이 활개를 치며 시민에게 피해를 주고 있지만, 단속은 쉽지 않다. 돈을 빌리는 행위를 무작정 단속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서울고속버스터미널 보안 담당자는 “단속할 만한 근거가 없다”며 시민들이 스스로 유의하길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반포지구대 김병규 주임은 “남수꾼들이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돈을 빌리는데다, 대부분 1만원 안팎의 적은 돈을 요구하기 때문에 이를 갚지 않는다고 해도 굳이 나서서 신고를 하는 사람은 드물다”고 말했다.

남수꾼들의 또다른 활동무대인 지하철도 마찬가지였다. 서울메트로 관계자는 “지하철 역사에서 남수꾼이 돈을 빌리고 있는 모습을 목격해도, 나중에 돈을 갚을 수도 있기 때문에 무턱대고 개입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대부분 경고 차원에서 끝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다만, 빌린 돈을 갚겠다고 약속한 뒤 갚지 않으면 사기죄로 처벌할 수 있다. 법무법인 한신의 양진호 변호사는 “휴대폰 번호를 묻거나 명함을 건네는 등 돈을 갚을 의사가 있는 것처럼 행동해 상대방으로부터 돈을 빌린 뒤 갚지 않는 행위는 금액과 상관없이 사기죄로 볼 수 있다”며 “여러 차례 같은 수법으로 돈을 빌리고 다니는 특정인물을 파악하고 있다면 사기의 고의성이 어느 정도 드러난 것이므로 적극적인 단속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