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빗속을 뚫고 도착한 대구 경신고는 우중충한 날씨와는 대조적으로 활기찬 모습이었다. 학교도서관은 쉬는 시간마다 책 빌리는 학생들로 북적였다. 고3 교실에서는 예비 수험생들이 선생님의 말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고3은 공부에 임하는 마음가짐부터 달라야 한다"는 선생님 말씀을 들으며 학생들은 의지를 새롭게 다졌다. 최성용 교감은 학생들을 가리키며 "학생들의 머리 길이가 학년이 올라갈수록 짧아진다. 공부에 방해받지 않으려는 작은 노력"이라고 귀띔했다.

학생들 스스로 공부 분위기를 조성

"우리 학교에는 닭장이 있어요. 공부를 하게 만드는 '촉매제'라고나 할까요? 친구들은 이 닭장에 들어가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또 선의의 경쟁을 합니다."

3학년 손상혁군은 이해할 수 없는 말로 학교 자랑을 늘어놨다. '닭장' '공부' '경쟁'…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의 조합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내심 궁금해졌다. 손군은 "닭장은 우리 학교 특별반을 가리키는 일종의 은어"라고 귀띔했다.

'닭장'은 내신성적과 모의고사 성적을 합산해 상위 100등 안에 드는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특별반'을 말한다. 독서실처럼 칸막이 책상에 한 명씩 자리 잡고 공부하는 모습이 마치 닭장 속의 닭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다. 성적이 상위 100등에 들지는 못했지만 공부하려는 의지가 큰 학생도 특별반에 지원 가능하다. 특별반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해서 주눅 드는 학생은 없다. 다만 어떻게 하면 특별반에 들어가서 공부할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열심히 공부하는 친구의 모습에 자극을 받아 전교생이 '열공' 모드에 들어가는 것이다.

대구 경신고.

교사의 이름을 내걸고 운영하는 보충수업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도 좋다. 사교육에서만 볼 수 있는 방법을 학교 수업에 적용한 것이다. 교사가 수업주제부터 커리큘럼, 교수 방법까지 전적으로 도맡아 수업을 개설한다. 최성용 교감은 "교사가 책임감을 갖고 수업에 임하며, 학생들은 정규수업에서 부족한 부분을 보충할 수 있기 때문에 성적 향상이라는 가시적인 효과를 가져왔다"고 귀띔했다.

모의고사 성적표가 나오는 날에는 교사들의 손놀림이 바빠진다. 전국 응시생과 비교해 경신고 학생들의 강·약점을 파악하기 위해서다. 각 과목 교사들이 분석한 자료를 토대로 문제를 뽑아 보충 수업이 이뤄진다. 올해부터는 방송으로 수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공부 못지않게 인성 교육에도 힘을 쏟는다. 학년별·학급별로 봉사활동을 접할 기회를 마련한다. 1학년 때는 일 년에 한 번씩 모든 학생이 꽃동네로 봉사활동을 나가고, 2~3학년 때는 학급별로 학교와 자매결연을 한 복지시설을 방문한다. 김홍일 교장은 "똑똑하기만 한 인재는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한다. 인성과 지성을 고루 갖춘 리더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경신고는 처음부터 '학력'으로 인정받는 학교가 아니었다. 1966년 상업학교로 시작해 1979년에 일반고로 전환했다. 전환 당시에도 지역에서 손꼽히는 기피학교였다. 그러다 1986년 학교법인 경신교육재단에서 학교를 인수하면서 변화하기 시작했다.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학교를 찾아가 벤치마킹했고, 수준별 이동수업을 실시했다. 수준별 이동수업을 권장하는 요즘과 달리, 당시에는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정부에서 이 수업을 금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경신고는 멈추지 않았다. 학생들의 학습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이만한 수업 방식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1학년 때 국·영·수 과목의 성적을 산출해 수준별 이동수업을 진행한다. 김 교장은 "학생 중심의 교육 프로그램만이 공교육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역 인재가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 교육 환경 조성할 것

'학력 경신'이라는 교육 목표에 걸맞게 매년 50여명의 학생이 서울 상위권 대학이나 의대에 진학한다. 공부에 욕심 있는 지역 학생은 진학을 희망하는 학교로 주저 없이 경신고를 꼽는다. 이런 성과를 낸 데는 김종년 재단 이사장의 교육 철학과 교사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노력이 주효했다.

교사들은 학생들이 사교육에 의지하지 않도록 사교육의 장점을 벤치마킹하고 전문적인 진로 상담을 위한 진학팀을 꾸렸다. 또 학생들의 생각을 읽고 진로 지도에 도움을 주기 위해 수시로 상담을 했다. 김 이사장은 교육환경 개선과 학생 장학금, 교원 복지 향상을 위해 적지 않은 돈을 내놓기도 했다. 학생회장인 3학년 김준식군은 "좋은 교육환경에서 공부하기 원하는 학생들은 우리 학교를 제1지망학교로 꼽는다"고 자랑했다.

경신고는 현재 자율형 사립고 전환을 신청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다. 김 교장은 "색깔 있는 학교가 속속 등장하는 요즘, 지역의 인재들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이들이 최고의 교육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자사고 전환을 신청했다"고 설명했다.

"교육환경이 급변하는 요즘, 학교가 변하지 않으면 학생들로부터 외면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경신고는 학생 중심 교육을 통해 봉사정신을 갖춘 글로벌리더를 양성하는 데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