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 선임기자

중학교 졸업식 직후 알몸으로 피라미드를 쌓고 일부 여학생들이 앞을 가리고 선 동영상을 봤다면, "그 나이에 뭐 그럴 수 있지" 하는 말은 결코 안 나올 게 틀림없다. 오히려 기성세대로서의 의무, 책임감을 새삼 다짐할지 모른다.

그래서 언론마다 당혹과 탄식을 섞어 '졸업빵'(뒤풀이)을 연일 보도하고, 심지어 이를 계기로 더욱 '막장'으로 가는 '학교폭력'의 문제점까지 다루고 있다. 전문가들은 "학교폭력이 더 대담하고 지능화됐다"고 진단한다. 증가하는 학교폭력 통계를 내놓으며 일부 학생들을 아예 '예비 범죄인'으로 보려고 한다.

이렇게 세상이 시끄럽자 사회의 안녕을 책임지는 경찰로서는 뭔가 실적을 보여야 할 입장에 놓이게 됐다. 설 연휴가 끝난 날부터 경기도 일산경찰서가 북적거렸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학생들을 불러들여 일문일답 진술 조서를 종일 작성했다.

"휴대전화 문자로 '졸업빵'에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았고" "나가지 않으면 선배들에게 혼날 것이 두려워" "작년 졸업빵에는 옷을 벗기고 금방 담요 덮어주고 목욕탕에 같이 갔다는데 올해는" "지금까지 연례적으로 해온 것"…. 조사가 끝난 학생들은 '대담한 알몸'을 할 때는 언제고 마치 겁먹은 양처럼 취재진을 피해 후다닥 달아났다. 보호자인 부모의 손을 잡고.

그저 평범한 학생들로 밝혀진 이들은 피해자·가해자로 나뉘었다. 하지만 형사계 플라스틱 의자에 앉는 순간 '상처'는 모두에게 똑같이 남을 것이다. 당초 학생들에게 '졸업빵'이란 이런 게 아니었다. 약간의 강압+호기심+해방감이 섞인, 도가 좀 지나치다 싶은 '장난'이었을 뿐이다. 그게 세상 어른들을 "우리가 방심한 사이 사회 풍기가 이렇게 문란해졌구나"라며 새삼 놀라게 하면서 '범죄'가 될 줄은 상상 못했을 것이다. 우리의 대통령까지 나서 "사회의 중병(重病)"이라고 했다.

거센 여론에 밀려 50대인 수사 실무책임자는 "좀 더 시간을 두고 조사를 해 집단폭력 혐의로 형사처벌을 검토하겠다"고 말했지만, 속마음에는 '국가공권력'이 이런 문제까지 개입하는 데 민망함을 갖고 있었다.

사실 이들이 알몸으로 수줍어하거나 낄낄거리고 있을 때, 인근의 다른 중학교에서도 '알몸 졸업빵'이 있었다. 하지만 그쪽은 인터넷에 동영상이 떠다니지 않아 '물의'를 빚지 않았기 때문에 운 좋게 넘어갔다고 한다. 형평성 문제를 어찌할까. 인터넷에라도 죄를 물어 처벌해야 옳다.

나도 똑같이 자식을 키우는 부모로서, 내 딸이 '졸업빵'에 가담해 "오늘 해방이다"며 벌거벗고 서 있다면 어떻게 했을까 상상해본다. 케첩과 밀가루로 범벅이 된 얼굴로 내 딸이 친구들과 함께 시내 한복판을 팬티만 입고 뛰어다니고, 경찰 순찰차가 애타게 '검거 작전'을 벌이는 장면도 그려본다. 또 추운 날 상의를 벗고 브래지어까지 내던지고 제주도 바닷물에 풍덩 뛰어들면 나는 어떤 입장이 될까 생각해본다.

배우는 학생으로서의 부적절한 처신을 분명 나무랄지 모른다. 하지만 인생에서 그날 '딱 하루' 졸업의 해방감을 맛보겠다는 아이를 결코 '형사 처벌'하지는 않을 것이다. 강압과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고 스스로 택한 행동이라면 말이다.

세상 부모들은 자기 자녀만은 바르고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길 바란다. 실제 대부분의 학생들은 옷을 찢고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벌거벗는 쪽보다는 부모와 함께 졸업 기념 외식을 할 것이다. 하지만 다른 선택을 하기도 한다. 아직 철부지 때고 충동적이고 잘 휩쓸리기 때문이다. 이게 문제라면, 이를 참지 못하는 사회적 여유와 어른의 관대함 또한 문제가 된다.

어린 학생들의 '알몸 졸업빵'을 보고 당황하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 벌거벗었기 때문에 성적(性的) 문란을 걱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는 눈이 온전한 걸까. 미국의 하버드대 남녀 학생들이 기말고사 전날 발가벗고 운동장으로 뛰쳐나와 마라톤을 하는 '전통'도 성적으로 바라볼 것이다.

그래도 사회 풍속을 위해 지켜야 한다고 고집한다면, 어린 학생들이 쉽게 몸을 노출시키는 것은 어디서 보고 배운 것일까. 소녀 연예인들의 허벅지를 탐닉하고, TV를 틀면 성애 장면을 묘사하는 춤이 일상화됐고, '짐승남'에 환호하고, 인터넷에서 항상 포르노를 볼 수 있게 된 세태는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것이다.

과거에는 이런 '사건'이 발생하면, 우리 사회와 어른들은 "이건 아이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로 받아들였다. 지금은 "정말 아이들이 문제"라고 떠넘긴다. 그런 뒤 해결사로 '국가공권력'을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