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대에 올라선 케미컬 알리는 오렌지색 점프 슈트(상·하의가 붙은 옷)를 입고 있었다. 이라크의 알 이라키야 TV가 공개한 사진 한 장이 지난 1월 25일 그가 최후를 맞았음을 알렸다. 알리 하산 알마지드(al-Majid), 사담 후세인(Hussein)의 사촌이자 오른팔이었던 자. 케미컬 알리에 대한 사형집행은 ‘후세인 왕조’의 종말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기도 했다.
특급 수배자 55명 중 10명 남아
지금까지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 본인을 포함해 배다른 형제, 사촌, 두 아들 등 가족들과 부통령, 대법원장, 비밀경찰국장 등 정권 핵심인물들이 미국의 침공에 맞선 전투 중 사망하거나 교수대에 올랐다. 2003년 미군이 발표한 이라크인 특급 수배자 55명 가운데 아직도 잡히지 않거나 죽지 않은 사람은 10명 정도에 불과하다. 그중 눈에 띄는 사람은 사담 후세인의 아내와 딸 등 대개가 여성이다. 더 타임스나 BBC 같은 영국의 언론들은 사담 후세인의 일가 친척과 고향인 티크리트 출신 심복들로 이뤄진 과거 이라크의 지배그룹에 ‘후세인 왕조’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들은 사담 후세인이 정권을 잡은 1979년부터 미국 주도 2차 걸프전으로 정권이 붕괴된 2003년까지 25년 가까이 이라크를 지배했다.
중동의 저명한 언론인인 레바논 일간지 ‘데일리 스타’의 마이클 영(Young) 에디터는 1월 17일 사담의 사촌 케미컬 알리의 교수형 집행에 대해 “한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안티 클라이맥스”라고 했다. 케미컬 알리는 1980년대 말 이라크 북부 쿠르드족 약 18만명을, 1990년대엔 중부 나자프 등지에서 이슬람 시아파 주민 수만 명을 학살한 주모자였다. 약 2000만명으로 추정되는 쿠르드족은 독립된 나라를 갖지 못한 세계에서 가장 큰 단일민족. 이란·이라크전이 한창이던 1980년대 이란은 이라크의 후방을 교란하기 위해 일부 쿠르드족의 반군활동을 지원했다. 이에 대한 사담 후세인 정권의 무자비한 보복을 이끈 사람이 케미컬 알리였다. 그는 특히 1998년 3월 이라크 북부 쿠르드족 마을 할라브자에 사린가스와 겨자탄 등 4~5종의 화학무기를 사용해 5시간 만에 5000명의 주민을 몰살시켰다. 이 중 3300명이 여성과 아이들이었다. ‘케미컬(Chemical·화공약품) 알리’라는 별명은 이때부터 생겼다. 할라브자 학살을 포함해 3년여 동안 계속된 쿠르드족 인종 청소 ‘안팔(Anfal) 작전’으로 19만명의 쿠르드인이 죽고 3000개의 쿠르드 마을이 지도 상에서 사라졌다.
두 아들, 7년 전 미군과 총격전 끝 사망
사담 후세인은 앞서 2006년 12월 교수대에 올랐다. 사담 후세인도, 교수형을 집행하는 정부 관리들도 모두 “알라후 아크바르(신은 위대하다)!”라고 외쳤다. 후세인 왕조의 기둥이었던 사담 후세인의 두 아들 우다이와 쿠사이는 아버지보다 먼저 갔다. 2003년 7월 북부도시 모술에서 미군과 총격전을 벌이다 사망했다. 당시 밀정의 첩보로 둘의 위치를 확인한 미군은 우다이와 쿠사이, 쿠사이의 14살난 아들 무스타파와 경호원 1명 등 4명이 있는 집에 대전차 공격기와 공격용 헬기를 동원해 공격했다. 미군은 치과기록 대조로 현장에서 발견된 사망자의 신원을 확인한 뒤, 사담 후세인 아들 두명의 시신 사진을 공개했다. 포로와 전사자에 대한 인도적 대우를 규정한 제네바협정 위반이라는 비난이 일었다.
맏아들 우다이는 국가 대항전에서 패배한 축구대표팀 선수나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낸 올림픽 대표선수들을 고문하는가 하면, 거리의 여성들을 납치해 성폭행한 뒤 살해하는 기행과 악행으로 유명했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2003년 우다이에 대해 보도하면서 “우다이는 정부군 장교의 아내를 거리에서 납치하면서, 반항하는 남편에게 나중에 반역죄를 뒤집어씌워 죽였다. 아내도 성폭행당한 뒤 살해됐다”고 전했다. 반면 둘째 아들 쿠사이는 신중한 전략가였다. 후세인은 말년에 쿠사이를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후세인 정권 측근들도 차례로 교수대에
사담의 배다른 형제이자 악명 높은 비밀경찰 ‘무카바라트’의 수장(首長)이었던 바르잔 이브라힘 하산 알 티크리티는 지난 2007년 1월 사담의 뒤를 따라 교수대에 올랐다. 1982년 바그다드 북쪽 시아파 마을 두자일의 주민 120명의 사형집행을 주도한 죄목이었다. 당시 두자일 마을에서는 시아파 무장정파 조직원이 사담 암살을 시도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바르잔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주민 120명을 법정에 세워 일사천리로 사형을 집행했다. 그는 또 국내의 반정부 인사들을 척살하고 국외에서 망명인사들을 암살한 총책이기도 했다. 10년 이상 이라크의 유엔 종신대사로 제네바에 머물며 후세인 일족의 해외자산도 관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형이 집행될 때 사용된 밧줄에 목이 잘렸다는 보도도 나왔다.
사담의 수족 중 한 명이었던 아와드 아흐메드 알 반다르 전 혁명 대법원장은 주군(主君)이 죽기 한 달 전인 2006년 11월 교수대에 올랐다. 그는 두자일 주민 120명에게 사형을 선고한 장본인이다. 타하 야신 라마단 알 지즈라위 전 부통령은 2007년 3월 교수형을 받았다. 술탄 하심 알 타이 전 국방장관과 후세인 라시드 알 티크리티 전 이라크군 작전 부사령관도 사형을 선고받고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케미컬 알리가 사형된 날, 이라크 법정에서 15년형을 받은 뒤 바그다드 서부 캠프 크라퍼 미군 기지에 수감 중이던 타레크 아지즈 전 부총리 겸 외교장관은 뇌졸중으로 쓰러져 언어능력을 상실했다. 그는 1차 걸프전 때 외무장관으로 이라크의 입장을 대외적으로 대변했던 사담 후세인의 ‘입’이었다. 사담 후세인이 대통령과 총리를 겸임하는 이라크 체제에서, 타레크 아지즈는 사실상의 국가원수 권한대행 역할도 했다. 안전문제 때문에 외국으로 잘 나가지 않는 사담 후세인 대신 각종 정상회담이나 국제기구 회의에 참석해 이라크의 입장을 변호했다. 걸프전 당시에는 바그다드가 함락되기 직전까지도 외신기자들에게 “이라크군이 미국과 영국 군대를 격퇴하고 있다”고 큰소리를 쳤던 인물도 바로 타레크 아지즈다. 그는 사담 후세인의 ‘이너 서클(inner circle)’에서 유일한 기독교인이기도 했다. 아들 아지드는 AFP통신에 “아버지의 뇌졸중은 벌써 세 번째다. 더 이상 위협이 될 수 없다. 이젠 제발 풀어달라”고 호소했다.
첫째 부인·맏딸은 요르단에 은신 중
아직도 잡히거나 죽지 않은 ‘후세인 왕조’의 가장 유명한 인물은 이자트 이브라힘 알두리 전 부통령이 거의 유일하다. 이자트는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당시 이라크의 군 사령관이자 부통령, 혁명집행위원회 부위원장이었다. 사담의 맏아들 우다이와 자신의 딸을 결혼시켜, 사담 후세인의 사돈이기도 했다. 사담 후세인 바로 뒤에 서는 왕조의 2인자였던 셈이다. 그의 목에는 1000만달러(약 120억원)의 현상금이 걸려 있지만 행방이 묘연하다. 이라크 중부의 이슬람 수니파 다수 지역, 혹은 바트당 정권이 집권 중인 시리아에 은신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2007년 3월 지금은 불법 정당 신세로 전락한 후세인 시대의 집권당 바트당은 “이자트 이브라힘을 최고 지도자로 선출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이밖에 사담의 첫 번째 부인 사지다 카이랄라 툴파 후세인과 맏딸 라가드는 요르단 왕가의 보호 아래 요르단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라가드는 아버지 사형집행 당시 은신처에서 나와 규탄집회를 주도하기도 했다. 두 사람 모두 '이라크 내 반군활동을 지원한 혐의'로 현 이라크 정부와 인터폴에 의해 수배령이 내려진 상태다.
/ 이태훈 조선일보 국제부 기자 libra@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