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6년 개봉했던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여성 암투극의 전형을 보여줬다. 신출내기 여직원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난 상사나, 요직을 차지하기 위해 배신을 일삼는 극중 여성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관객들은 그 개연성에 맞장구를 쳤다.
지난해 12월 결혼정보회사 ‘듀오’가 직장인 339명(남성 104명, 여성 23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여성들이 생각하는 ‘직장생활의 가장 큰 적’은 다름 아닌 ‘여자 상사’(48%)였다. 영화 속 주인공이야 갖은 중상모략을 견뎌낸 뒤 행복한 결말을 맺었지만, 현실 속 암투극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여성 상사에게 ‘미운털’ 박히면 괴로운 직장여성들
A증권사에 다니는 정지희(가명, 25세)씨는 요즘 아침마다 ‘외모 감추기’에 공을 들인다. 같은 지점에 근무하는 30대 여자상사가 복장은 물론, 머리스타일이나 화장법에까지 훈수를 두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튀는 옷을 입고 오면 곧바로 지적을 하세요. 화장이 진하다, 머리를 묶으니 얼굴이 더 커 보인다 등등. 업무에 대한 지적이라면 이해할 수 있지만, 자꾸 외모에 대해서 핀잔을 주시니까 기분 상해요. 괜한 질투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얼마 전 남자선배로부터 커피 한잔을 얻어 마셨다가 여자 상사에게 ‘빽 있냐’는 비아냥거림을 들었다. 정씨는 “앞으로 회사생활이 녹록치 않을 것 같다”며 한숨을 쉬었다.
외국계 IT회사에서 인턴을 했던 김소영(가명, 25세)씨도 여성 상사에게 미운털이 박혀 곤란을 겪었다. 그는 “팀의 막내 인만큼 모든 일에 적극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일부러 커피도 타다 드리고 인사도 밝게 했는데 여자 대리님께서 ‘너무 나서지 마라’는 충고를 했다”고 말했다. 일정기간 인턴 근무를 마친 후 정규직 전환을 약속받았던 김씨는 여자 상사와의 갈등으로 결국 중도에 퇴사해 다른 회사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케이블방송국의 보조 작가로 근무하던 김혜미(가명, 26세)씨는 사무실 내에 유일한 여자인 메인작가와 사이가 나빠져 일을 그만뒀다. 메인작가와는 ‘언니 동생’ 하며 친하게 지내는 터라 종종 PD나 연출진에 섭섭했던 감정을 털어놓곤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자신과 했던 말을 당사자에게 그대로 옮긴다는 사실을 알게 됐던 것. 김씨는 “앞에서는 맞장구까지 쳐가며 편을 들어줬던 사람이 서로 이간질을 했다는 생각에 충격이 컸다”고 말했다.
B 기업에 근무하는 김진수(가명, 30세)는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에 100% 공감한다고 했다. 자금 팀의 유일한 남성인 그는 얼마 전 신입여직원이 들어왔던 날을 떠올리며 말했다.
“원래 신입사원이 들어오면 작은 일이라도 업무 분담을 하게 돼 있어요. 제 동기가 알아서 챙겨주겠지 했는데 며칠이 지나도록 그냥 멀뚱히 앉혀놓기만 하더군요. 그래놓고 부장님한테는 신입사원이 아무 일도 안 한다고 슬쩍 흉을 봤어요. 얼마나 황당하던지. 여자직원들끼리 뒤에서 서로 욕해놓고 앞에서 친하게 지내는 것도 솔직히 이해가 안돼요.”
◆가볍고 친숙한 대화로 경계심을 허물자
전직 항공사 승무원 김윤선(가명. 27세)씨는 “여자 사이의 묘한 질투심이나 개인적인 감정에 따라 후배들을 혼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털어놨다. 김씨는 “외모나 능력이 유난히 빼어난 친구들은 그만큼 여러 사람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다”며 “개인적인 감정을 앞세워 불리한 대우를 해서도 안 되겠지만 본인 스스로도 조직원들과 어울리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호서대 산업심리학과 김명소 교수는 “여성 관리자는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상대적으로 남성에 비해 혹독한 경쟁을 거쳤기 때문에 동성의 후배나 부하직원들에게 좀 더 엄격한 기준이나 역할을 기대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것을 단순히 질투의 의미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미흡한 업무수행을 보완해 좀 더 분발하도록 독려하는 과정이라고 보는 편이 좋다는 조언이다.
그러나 여성 부하와 상사 간의 과도한 긴장감은 업무능률의 저하는 물론, 조직 분위기를 해칠 염려가 있다. 냉랭한 관계의 회복을 위해선 자신의 잘못을 먼저 인정한 뒤 상사의 이해를 구하는 편이 중요하다. 서비스코칭센터 박소영 강사는 “감정이 앞서는 말보다는 이메일이나 문자메시지를 통해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는 것이 좋다”며 “특히 식사나 커피 등을 함께 하면서 소소한 일상 얘기를 통해 공감대를 형성하도록 유도하라”고 조언했다. 감정을 공유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경계심이 풀어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여자생활백서’의 저자 안은영 작가는 “조직 내 '여-여' 관계는 동성이라는 이유로 말 못할 고민을 공유하고 의지하는 동시에 경계의 대상이 되는 등 마치 양날의 검과 같다”며 “예의를 지키되, 터놓지도 내외하지도 않는 중도의 지혜를 발휘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변지성 잡코리아 홍보팀장은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차츰 증가하면서 여성상사와 일할 기회가 많아지고 있다”며 “여성상사와 함께 일하는 것이 쉽고 어렵고를 떠나서 공과 사를 구분해 대처하는 것이 지혜로운 직장 생활”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