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잠출 울산MBC 시사담당PD·국장

울주군 언양읍 반연리(盤淵里)는 작년 봄 울산과학기술대학교(UNIST)가 문을 열면서 더 유명해졌다. 태화강을 사이에 두고 진목, 사일과 마주한 양지바른 마을이다. 마을 서북쪽에 사연댐이 있고 그 사이에 곡연마을이 길게 골짜기처럼 들어가 있다. 울산과기대 입구 오른편에 경숙옹주의 태실과 비가 있는 태봉산이 뾰족하게 서 있다. 대학본부를 돌아 오른쪽 뒤로 가면 가막못(烏池淵)이 아직 남아 있는데 그 못을 지나면 장골산(長谷山)이 버티고 있다. 바로 앞 하천에는 왕버들 한그루가 200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다. 1982년 울주군이 보호수로 지정한 높이 9m의 왕버들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발복지

왕버들 오른편 산기슭에 정무공 최진립(崔震立) 장군 묘가 있다. 정무공은 '경주 최부자' 가문을 일으킨 바로 그 인물이다. 그래서 풍수가들은 이 묘역을 '최부자 발복지(發福地)'라고 말한다. 조선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우리나라 부자의 대명사로 칭송받아 온 경주 최부자집의 시작이 이 어른이었다는 생각에 300여년 부와 명예를 지켜 온 비결을 곱씹어 본다. 존경받는 부자, 칭송받는 부자가 그립다(최근 드라마 〈名家(명가)〉를 통해 다시 조명되고 있기는 하다).

정무공은 마지막 최부자 최준의 11대조로 정유재란 때 서생포 전투 등에서 공을 세웠고 병자호란 때 용인(龍仁)에서 전사했다. 풍수가들은 당시 나라에서 국풍(國風)까지 보내 묘 터를 물색해 국장(國葬)으로 하였으니 명당이라고 주장한다. 권상일 부사가 묘비명을 지은 아들 동량의 묘가 위에 있고, 바로 아래에 있는 정무공의 묘비명은 홍문관 교리 정박(鄭撲)이 지은 것이다. 지난해 봄 도난당한 무인석과 석물들의 파손 흔적을 보니 가슴 아프다(울산과기대 교정 안에는 정무공 묘에 대한 안내판 하나가 없어 학교에서 만난 사람들은 왕비 묘라고 말하기도 했다).

장군 묘에서 정면으로 바라보면 울산과기대를 중심으로 태봉산 문수산이 좌우로 도열해 있고 범서 삼산의 아파트까지 손에 잡힐 듯하다. 산꼭대기에서 서쪽을 보면 가지산 고헌산등 언양 7봉의 맥이 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산줄기의 중간보다는 끝자락에 명당이 많다고 하지 않았던가!

울산 울주군 언양읍 반연리에 있는 경주 최부자의 효시 정무공 최진립 장군 묘와 그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울산과학기술대학교 전경.

◆담대한 선비의 '처변불경'

울산과기대 정문 오른편에는 붓끝처럼 생긴 필봉(筆峯)이 홀로 솟아 있다. 왕실의 태(胎)를 묻은 태실과 비가 있는 태봉산이다. 왕실의 태실과 관련된 문화재는 울산에 하나뿐이다. 반연마을에서 사연댐 방향으로 가다 '관사징이 마을' 입구에 이르면 '경숙옹주 태실비 및 비'라는 간판이 있다. 논 사이로 난 좁은 길을 따라 산마루까지 오르면 쉽게 찾을 수 있다. 비의 앞면에 '王女合歡阿己氏胎室(왕녀합환아기씨태실)', 뒷면에 '成化二十一年八月初六日立(성화이십일년팔월초육일립)'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이는 시기적으로 조선 9대 임금 성종 16년(1485년)을 말하고, 태실의 주인공은 경숙옹주라고 추정된다. 요즘 덕혜옹주란 소설이 유명세를 타고 있는데 왕의 본부인, 즉 중전에게서 난 딸은 공주이고 후궁이 낳으면 옹주라 했다.

산을 내려와 사연댐 옆 반연천을 따라 골짜기로 조금만 들어가면 관서정이 나타난다. 관서정은 정자명이자 마을 이름이다. 예전엔 '굼소'라고도 불렀는데 주민들은 '관사징이'라고도 부른다. 관리를 맡고 있는 김지열(60)씨는 "많은 땅이 대학 부지에 들어가고 여덟집이 남았는데 대부분 재종 삼종 정도 가까운 친척 사이"라며 "경주 김씨 계림군파 후손들"이라 소개한다.

관서정(觀逝亭)은 입향조 '경'이 지은 정자이다. 경이란 인물은 조선 영·정조 때 선비였다. 반구대를 찾던 권상일 부사가 이곳을 지나다 글 읽는 소리에 반해 서로 친해졌고 권 부사가 다른 지방으로 가면서 정자 이름을 지어줬다고 한다. 선비들의 우정과 친교의 멋스러움, 처변불경(處變不驚) 자경자강(自敬自强)의 정신을 배울 만하다. 상량문에 '己亥年'(기해년)이라 표기되어 있어 1959년에 중건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대나무 숲에 묻혀 초라한 모습이지만 예전에는 한실에서 흘러나온 맑은 물이 정자 앞으로 굽이쳐 흘렀고 선비들이 모여 풍류를 즐겼을 것이다. 4칸 정자 기둥에 '淸冷寒澗水'(청냉한간수) '眷富此婆娑'(권부차파사)라는 글이 주렴처럼 붙어 있다.

울주군 언양읍 반연마을의 관서정과 정자 관리인 김지열씨. 옛 선비들의 담대한 멋 과 풍류를 간직한 정자다.

◆옛길 멈춰도 태화강은 흐른다

이곳의 빼어난 경관도 1965년 사연댐이 건설되면서 변해버렸다. 태화강 100리 길도 반구천 구곡(九曲)을 따라 가는 길이 막혔고 한실·반곡·다개·구량·천전·장천사지·반고사지도 국도를 따라 한참 둘러 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녹문(鹿門)이란 석각(石刻)도 백련정도 모두 옮겨 갔다. 또 포은 정몽주 선생이 벼루를 씻었다는 세연동(洗硯洞)의 멋진 이름도 댐에 수몰되었다. 최근 가뭄으로 물 밖에 전체 모습을 드러낸 반구대 암각화도 5분여 거리건만 바로 갈 수가 없다.

원래 왔던 국도로 되돌아나와 울산과기대 입구에서 오른편으로 걸으면 언양읍 미연과 무동 마을길이 이어진다. 1990년대 초반까지 버스가 다니던 배락더미(배리끝)와 강변의 자갈길, 새마을 다리가 아직 남아 있다. 반연 마을은 배락더미 아래 배락소에서 끝난다. 배락소는 배리끝(낭떠러지) 아래에 고인 깊은 물을 말한다. 울산에는 배리끝이란 지명이 많다. 배락끄티이·배락소·배락더미 등…. 또 언양에는 반(盤)자 지명이 많다. 그만큼 언양은 편편한 돌(盤石)이 많았다는 증거다. 반연·반천·반송·반곡·반구대·반호….

사람들은 새 길이 생기면 예전에 걷던 길을 외면하게 된다. 옛길로의 걸음이 멈춰지고 세월도 멈춘다. 그러나 태화강은 멈추지 않는다. 수천년 그래왔듯 강마을 사람들의 삶과 함께 해 온 그대로 쉼 없이 흘러갈 것이다. 바다로 흘러가는 태화강에도 봄기운이 서서히 오고 있다. 곳곳에 얼음이 녹아 물과 함께 떠내려간다. 그러고 보니 입춘이 코앞이다. 계절은 어김없이 바뀌고 강과 산은 계절에 맞춰 또 변할 것이다. 올겨울이 많이 추웠던 만큼 봄볕이 더 기다려진다. 2월 한낮의 햇볕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그만큼 가벼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