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화강을 따라 울주군 범서 선바위를 지나 상류 쪽 망성다리를 건너면 가파른 산들이 앞을 가로막는다. 두동으로 가는 도로는 그 산들의 골짜기 속에 놓여 있을 뿐이다. 국수봉·연화산이 마주 보며 골을 만들고 왼쪽으로 무학산 줄기가 학의 날개처럼 지지마을까지 북쪽으로 뻗어 있다. 범서의 산들이 모두 경주를 향(向)한다는 말이 실감난다. 다리 건너 왼편으로 들면 아름드리 나무들을 만나는데 한눈에 오래된 마을임을 알 수 있다. 범서읍 망성(望星)마을이다.
◆별을 바라보는 마을, 망성(望星)
'망성(望星)'-이름 자체가 시적인 이 마을을 정일근 시인은 '별을 바라보는 마을/ 별이 뜨는 동쪽을 향해 따뜻하게 열린 마을'이라고 노래했다. 10여년 전만 해도 여름밤 마을 언덕배기에서 강물을 바라보면 입암(立岩)들과 솔고개, 천상, 문수산이 한눈에 들어오고 개똥벌레들은 꼬마전구처럼 불빛을 마구 쏟아내며 강둑을 날아다녔다. 문수산 너머까지 온 하늘에 무수한 별들이 걸려 있던 곳이다.
그랬던 망성마을도 변했다. 강변 조망 좋은 곳은 대형 음식점이 들어섰고 욱곡·사일 가는 강변길은 모두 시멘트로 덮였다. 나이 많은 팽나무 가지가 잘려나갔고 오랜 마을 역사와 전통을 알려주던 완계정도 마을 뒤편으로 숨어버렸다.
망성 바로 옆 골짜기 욱곡은 단감단지로 유명하다. 이조참의 정공(鄭公)의 묘를 지나 무학산을 오르며 욱곡을 내려다보면 완전한 분지형의 땅 모양이 특이하다. 마치 손바닥을 오므려 쌀을 움켜쥔 듯한 모양새다. 이 산 정상의 한실재는 사연댐 저 편 두동·두서 가는 길로 연화산과도 이어진다. 범서와 두동을 이어주던 옛길이었다. 연화산 아래 지지물탕골과 헛고개는 1000년째 그 자리에 있다. '헛되고 헛되도다'라는 구약성경 구절을 떠올리게 하는 고개다.
◆'여나산곡' 슬픈 사랑얘기도 전해
망성의 북쪽에 솟아 있는 연화산은 여나산곡(餘那山曲)의 탄생지이다. 여나산곡은 우식곡·치술령곡과 함께 울산과 관련된 향가 내지 고려가요의 흔적이다. 고려사 악지(高麗史 樂志)를 보면, 여나산(연화산)에 살고 있던 서생(書生)이 과거에 합격해 시험관 자리에 올랐는데 그 후 과거 합격생들이 사배(謝拜)의 예와 잔치를 배풀면서 영광의 노래를 지어 불렀다. 이 기쁜 노래를 여나산곡이라 하는데 가사와 곡은 전하지 않는다
민간에선 이루지 못한 사랑 이야기로 전해진다. 옛적 산 아래 이웃 마을의 여랑(餘郞)과 나비(那飛)가 나무와 나물 캐다 첫눈에 반했다. 사랑이 깊어져 상사병이 났지만 애만 태울 뿐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 여랑은 서라벌로 가 화랑이 되었고 나비는 부모님 성화에 혼인을 앞두게 되었다. 여랑을 그리워하며 식음을 끊은 채 앓던 나비는 혼인 전날 치마끈에 목을 매 자진하였다. 몇 년 후 화랑들과 함께 연화산을 찾은 여랑이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3일 밤낮을 까무라쳐 일어날 줄 몰랐다. 여랑은 나비의 무덤 곁에 움막을 짓고 살면서 여나산곡을 지어 불렀다. 사람들은 여랑과 나비의 앞 글자를 따 연화산을 여나산이라 했다. 이 사연은 지금도 할머니들이 나물 캐는 노래에 담아 부르곤 한다. 천전리 서석곡(書石谷)에서 사랑의 맹세를 한 갈문왕과 어사추여랑(於史鄒女郞)의 슬픈 로맨스와 어딘가 닮아 있다.
◆잘생긴 명당(明堂), 사일마을
'Y'자형 합수머리에 터 잡은 마을이 명당(明堂)이라는 것은 풍수의 기초다. 사연리 사일마을도 태화강의 두 물이 합치는 아우라지가 마을 앞에 있어 명당이라고 했다. 가지산 쌀바위에서 시작해 언양 남천, 구수, 반천을 지나온 물과 백운산에서 발원해 두북·두서·반구 9곡을 거쳐 대곡천을 내려온 물이 사연댐 아래에서 만나니 사람들은 이곳을 삼봉지역-아부래미라고 부른다. 강원도 정선 아우라지와 같은 뜻이다. 지금은 대곡천에서 내려오는 물은 사연댐에 막혀 버렸다.
사일은 마을 앞에 강과 너른 들판이 있고 뒤로는 무학산이 병풍처럼 둘러싸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마을이다. 다전 서씨(徐氏)가 집성촌을 이뤄 400여년 전부터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아왔다. 이곳의 서씨 종가(宗家)는 240여년의 역사를 가졌는데, '맑은 시냇물처럼 살았던 분'으로 존경받는 서상연 시인이 기거했던 고택으로 유명하다. 안채와 사랑채에 따로 출입문이 있고 건물은 7칸의 일자형 구조다. 대문 앞에 구빙담(求氷潭 혹은 빙어담·氷魚潭)이라는 연못이 있는데, 엄동설한 병환 중인 부모님께 드릴 잉어를 구한 못이란 뜻이니 충효가 이 집안의 상징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마을 회관 앞에서 만난 김씨 할머니는 "곡연 늠네 벼락소 굼소 너브수 살수 아부림수…" 등 사연리의 땅이름들을 막힘없이 말하는데 우리말로 된 이름들이 정겹게 들린다. 사일 끝자락 댐 아래 다리를 건너 반연을 바라보면 국립 울산과학기술대학교 건물 끄트머리가 보이고 삼각형 봉우리가 솟아 있다.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12호인 '경숙옹주 태실과 비'가 있는 태봉산이다.
◆개발도 정비도 겸손하게 해야…
지금의 태화강은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한 전성기를 맞고 있다. 돈을 많이 들인 만큼 많이 변했고, 전국적으로도 유명해졌다. 하지만 너무 서두르지 말아야겠다. 개발도 정비도 겸손하게 대해야 한다. 망국(亡國)에 대한 경순왕의 만시지탄(晩時之嘆)이 서린 헛고개나 조금씩 나오는 쌀이 아치러워 그냥 콱 쏟아지라고 욕심내다 결국 물만 흐르게 된 쌀바위…. 욕심과 경쟁, 속도가 얼마나 허망한 결과를 낳는지를 태화강이 가르쳐 주는 게 아닌가.
우리가 걸으면서 생각하고 걸으면서 성장해 왔듯이 용금소에서 시작한 태화강 백리가 어느새 범서를 지나고 있다. 망성리에서 별을 바라보고 사일에서 울산을 사랑했던 시인의 맑은 음성을 기억하고…. 그러다 태화강 소(沼)를 만나고 산과 들이 만들어 낸 풍경들을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