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 때 나치는 수많은 유대인을 학살했다. 그런데 세계사 수업시간에 몇몇 학생들이 팔짱을 끼고 교사의 이런 설명에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낸다. 유대인 학살이 조작된 것일 수 있다는 얘기를 들은 것이다. 학교 밖에서는 이 같은 내용의 대안 이론에도 동등한 수업시간을 할애하라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지식인들 사이에 유행처럼 번지는 상대주의는 세상에 절대적 진리는 없다고 말한다. 유대인 학살이 사실이냐 아니냐 역시 개인의 신념 문제라는 것이다.
영국 옥스퍼드대의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과학수업에 진화론이 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고 개탄한다. 미국에서 진화는 단지 하나의 이론일 뿐이며, 그에 반대하는 창조론 역시 대등하게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이 끊이질 않고 있다. 실제로 일부 주에서는 진화론과 창조론을 함께 가르치고 있으며, '진화'란 단어를 '시간에 따른 변화'로 바꾼 교과서도 나왔다. 미국의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40% 이상이 진화를 부정한다. 지구의 나이는 1만년 이하이며, 인간이 공룡과 같이 살았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다윈의 '종의 기원' 발간 150년을 맞아 로마교황청이 진화론 학술대회를 공식후원하는 세상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도킨스는 자신이 그동안 뭔가 빠뜨렸다고 말한다. 1976년 처음 내놓은 《이기적 유전자》에서 최근의 《만들어진 신》에 이르기까지 진화에 대해 다양한 얘기들을 했지만 정작 진화의 증거 자체는 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10번째 책인 《지상 최대의 쇼》는 고생물학에서 발생학·유전학·해부학 심지어 역사와 철학·문학까지 총동원해 진화에 대한 증거를 낱낱이 밝히고 있다. 제목 그대로 눈 깜빡거리는 것조차 아까운 멋진 쇼처럼, 페이지마다 놓칠 수 없는 과학적 증거와 도킨스 특유의 신랄하고 명쾌한 설명이 가득하다.
한 예로 화석을 얘기할 수 있다. 구글에서 '진화'를 검색하면 진화에 대한 과학적 설명보다 진화론의 허점을 파고든 일부 종교계의 주장이 더 많이 나온다. 대표적인 것이 '잃어버린 고리'다. 진화론이 옳으면 반드시 있어야 할 화석 증거가 군데군데 비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도킨스는 진화에서 화석은, 살인 현장에서 발견된 살해 도구에서 범인의 DNA와 지문을 찾았고 살해 동기마저 확인한 상태에서 우연히 발견한 감시카메라 영상과 같은 보너스일 뿐이라고 말한다. 증거가 확실한데 감시카메라 영상에서 범인이 살해하는 장면이 없다고 무죄를 선고할 수 없듯이 화석 말고도 진화를 설명할 증거는 차고 넘치는데 뭐가 문제냐는 것이다. 도킨스는 오히려 "단 하나의 화석이라도 진화가 설명하는 시기의 지층이 아닌 곳에서 발견된 것이 있느냐"고 반문한다.
도킨스의 이런 설명 방식은 그가 이 책을 쓴 목적을 반영한다. 그는 유대인 학살을 부인하듯 진화를 부정하는 '역사 부인(否認)주의자'들이 아니라, 진화를 옹호하기엔 지식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을 무장시키기 위해 이 책을 썼다. 그래서 그는 교양생물학 수업처럼 서론부터 결론까지 차근차근 가는 대신, 당장 토론에서 써먹을 수 있을 정도로 도발적인 질문과 그에 대한 적극적인 논박으로 책을 구성했다. 하등생물에서 고등생물로 가거나, 백악기에서 빙하기로 가는 등의 순서도 없다. 이를테면 진화를 설명하면서 첫 장에서 인간에 의한 야생동물의 가축화를 먼저 얘기한다. 인간이 고작 몇백 년이나 몇천 년 만에 늑대를 귀여운 애완견으로 만들었다면, 수백만 년에 걸쳐 자연에서 그보다 큰 변화가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책 두께가 부담스럽다면 손 가는 대로 이곳저곳을 오가며 읽는 것도 좋다. 수많은 생물의 진화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다가, 때때로 사람에서 갑자기 박테리아로 가는 순간이동도 일어난다. 어차피 진화라는 거대한 강물에서 다 만날 테니 말이다.
☞ 도킨스의 다른 책들
도킨스는 1976년 첫 책 《이기적 유전자》에서 "생물 개체는 자신을 더 많이 퍼뜨릴 생각만 하는 유전자를 운반하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과감한 주장을 펼쳤다. 도킨스는 이후 《에덴 밖의 강》에서 DNA 강줄기를 따라 생명이 진화한 경로를 밝혔으며, 《불가능의 산을 오르다》는 자연선택이 어떻게 복잡한 생명체의 진화를 이끌 수 있었는지를 보였다.
최근 도킨스는 종교와의 정면 승부를 펼쳤다. 19세기 한 신학자는 "시계공의 의도대로 시계가 만들어지듯이 이 세계 또한 신의 의지대로 창조되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도킨스는 《눈먼 시계공》에서 "자연선택에 따른 생명체의 형태와 그들의 존재에는 어떠한 계획이나 의도 따위는 들어 있지 않다"며 "만약 어느 누군가가 자연의 시계공 노릇을 한다면 그는 '눈먼 시계공'일 것"이라고 반박했다.
《만들어진 신》에서는 아예 "신은 착각이고 날조됐고 만들어졌다"고 대놓고 말했다. 만약 이 세상이 신의 '지적 설계'에 의해 창조됐다면 설계자 자신의 기원(起源)은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는 모순에 부딪히게 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