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배우 일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도 못했다."
한국의 모든 젊은 남자들에게 군대란 청춘의 단절이다. 배우라고 예외는 아니다. 그동안 땀흘려 쌓아올린 연기 경력과 이미지, 대중적 인기는 잊혀지거나 녹슬어 간다.
2006년 3월 2일 고수는 군에 입대했다. 군대 가기 전 인터뷰에서 그는 "군대에 다녀오면 뭔가 나만의 '무기'를 하나쯤 가지고 나오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고수가 4년만의 침묵을 깨고 영화 '백야행-어둠 속을 걷다'를 통해 돌아왔다. 사랑하는 미호(손예진)의 주위를 맴돌며 어둠 속에서 그녀를 지켜주는 남자 요한을 연기했다.
요한을 통해 고수가 빚어낸 '그만의 무기'는 무엇일까.
▶4년의 공백, 고수의 재발견
고수는 공익근무요원으로 강남구청에서 출퇴근을 했다. 새로운 일에 적응하면 그전까지 하던 일은 멀어지는 법이다. 고수에겐 그 속도가 남보다 더 빨랐다.
"연기를 하는 게 먼 일로만 느껴졌다. 다시 내가 이쪽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이미 다른 생활에 많이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4년의 공백을 거쳐 '백야행'의 첫 촬영이 시작됐을 때 무뎌진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
"지금도 100% 적응됐다고 말하긴 힘든 것 같다. 다른 세상에 살다 보니 촬영장 분위기라든가 모든 게 어색하고 생소했다. 그러다 카메라 앞에 서면서 조금씩 예전의 감각이 새록새록 떠오르고. 카메라 앞에서 감독님의 디렉션 같은 것들이 살아나더라. 머리는 잊고 있었는데 몸은 기억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자의든 타의든 무언가를 잃었을 때야 비로소 그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끼는 법이다. 고수에겐 연기가 그랬다. "'백야행'을 하는 동안 일의 소중함을 느꼈다. 그전엔 미처 생각 못한 것들을 요즘 많이 느낀다."
▶요한의 그림자가 되다
한 중년 여성이 술에 취한 채 바에 엎드려 있다. 그녀의 옆에 다가와 앉는 요한. 그는 여자의 빈 잔에 술을 따른 뒤 천천히 병나발을 분다. 잠시 뒤 깨어난 여인은 아들이 남기고 간 종이 쪽지를 보며 울음을 터트린다.
"요한은 다중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다. 용서받지 못할 아들이자, 한 여자의 연인이고 그림자이자, 그녀를 위해 사람을 죽이는 살인자다. 본질적으로는 어둠 속을 혼자 걸어가야 하는 외톨이다. 요한의 삶을 존중해야만 그를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시사회 직후 고수의 영화속 정사신이 화제였다. 수위가 높았다. 고수는 "그 신(scene)은 요한이를 설명하기 위해 너무나 절실한 장면이었다"고 설명했다.
'백야행'은 일본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일본에서는 드라마로도 만들어지며 화제를 모은 작품이지만 고수는 일부러 원작과 드라마를 보지 않았다.
"오직 영화에만 집중했다. 요한이라는 인물이 그림자로 살아가는 느낌,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외로움을 느끼려고 했다. 요한이 하는 행동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계기와 생각을 끄집어내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했다."
▶시간이 건내준 비밀무기
이제 다시 고수의 '무기' 얘기로 돌아와보자. 군대 가기 전 인터뷰 얘기를 꺼내며 어떤 무기를 찾아왔는지 물었다.
"나만의 무기? 그땐 뭔가가 있을 줄 알았다. 근데 막상 보니까 그런 건 애초에 없더라. 그냥 자연스럽게 시간만 흘러갈 뿐이었다."
그럼 4년의 공백기를 거쳐온 그는 빈 손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 걸까. 그건 아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건 없었다. 대신 그동안 못했던 경험을 하면서 생각을 많이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연기에 임하는 자세도 예전보다 더 진지해진 것 같고, 그전까지 눈감고 있던 것들에 대해 이해하려고 더 노력하는 것 같다. 굳이 표현하자면, 세상을 보는 눈이 좀 더 넓어지고 여유로워진 것 같다."
고수는 현재 드라마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SBS)를 준비 중이다. 다음달 초 방송 예정이다.
"'백야행'도 그렇고 그동안 정통 멜로를 할 기회가 없었다. 멜로를 하고 싶다고 생각할 즈음에 마침 드라마에 캐스팅 됐다. '백야행'에서 못 다 보여드린 것들을 드라마를 통해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