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가자. 오늘은 파도가 높다!"
평생 배만 탔다는 미겔 베가(65·Vega)씨의 재촉에, 붉은색 방한복과 고무로 만든 노란색 전신(全身) 우의를 부리나케 입었다. 베가씨는 몸에 거추장스러운 이 옷을 안 입으면, "대왕오징어(giant squid)잡이 배는 못 탄다"고 엄포를 놨다.
24일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서 북쪽으로 460㎞ 떨어진 코킴보(Coquimbo) 항구에서, 칠레의 전형적인 대왕오징어잡이 배인 '파드레 피오(Padre-Pio)'호에 올랐다. 가로 2m, 세로 6m에 중량은 고작 5t. 칠레 어부들은 이 배에서 2m 안팎의 크기에 30~50㎏(한국산 오징어는 300~500g)에 이르는 대왕오징어를 잡는다. 2시간 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집어등(集魚燈)은커녕 손전등이 유일한 조명기구였다.
대왕오징어를 잡는 기구는 의외로 간단했다. 100m쯤 되는 빨랫줄 굵기 낚싯줄 끝에 약 40㎝ 길이의 쇠봉을 달고, 쇠봉 끝에는 촘촘하게 못을 20㎝쯤 박았다. 쇠봉에는 너풀거리는 비닐봉지와 발광(發光)찌를 달았다. 수심 50~100m에 사는 '순진한' 대왕오징어가 이 비닐봉지를 먹잇감으로 알고 덥석 물면 못에 걸리게 된다.
사실 대왕오징어 안주는 '음식 한류(韓流)'의 원조격이다. 조원배(55·수산업) 사장은 "1992년에 원양어선이 잡아온 대왕오징어를 속초에서 가공해서 오징어채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전에는 칠레에선 대왕오징어가 잡히면 버렸지만, 한국인들이 포를 뜨고 말려서 '오징어 진미채'나 안주용 오징어로 먹는 방법을 개발했다. 한국의 오징어 가공공장이 중국으로 옮겨가면서 중국에 대왕오징어로 만든 오징어 안주 열풍이 불었고 이젠 중국이 최대 수입국이 됐다. 그새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대왕오징어의 주(主)서식지는 멕시코에서 칠레와 페루로 내려갔다.
파도가 한번 몰아칠 때마다 '쪽배' 수준인 '아빠 피오'호는 1~3m가량 크게 출렁거렸다. 두 손으로 배를 잡고도 어질어질했지만, 키를 잡은 후안 타피아(45·Tapia)와 동생 에두아르도 타피아(39)는 발에 본드라도 붙인 양 똑바로 서 있었다.
동생 에두아르도가 "히비아 보니타 보니타(jibia bonita bonita·'예쁜 대왕오징어야')"라고 외치며 낚싯줄을 던졌다. 그리고 좀 지났을까. 형 후안이 "어!"하며 낚싯줄을 바쁘게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뀌이이익~" 낚싯줄에 끌려 올라온 1.5m쯤 되는 대왕오징어는 괴성을 지르며 먹물을 쏴댔다. 노련한 후안이 엎어치기 하듯 오징어를 바닥에 내리쳤고, 녀석은 곧 기절했다.
곧이어 베가씨가 "휘~익" 휘파람을 크게 불더니 실타래 감듯 낚싯줄을 당겼다. 기자는 낚싯줄을 잠시 넘겨받아 당기다가 포기했다. 쌀가마를 낚싯줄로 들어 올리는 듯했다.
1년밖에 살지 못하는 대왕오징어는 큰 몸을 유지하려고 닥치는 대로 먹어댄다. 그래서 어족(魚族)자원 고갈의 주범으로 찍혔고, 칠레 정부도 대왕오징어에 대해서는 금어기(禁漁期)도 두지 않는다.
다른 곳으로 이동해 낚싯줄을 던졌지만, 두 마리를 더 잡는 데 그쳤다. 베가씨가 "오늘은 파도가 너무 높아. 돌아가자"라고 했다. 기자가 세 번 게운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