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세 안재홍 선생

가을 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비석을 감싼 하얀 천이 벗겨지자 한글 '민'자를 형상화한 비신(碑身)이 제 몸을 드러냈다.

한글날인 9일 오후 2시 충청남도 천안 독립기념관 본관인 '겨레의 집'과 흑성산 사이 푸른 잔디 뜰에서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지도자였던 민세(民世) 안재홍(安在鴻·1891~1965) 선생 어록비 제막식이 열렸다. 민세 선생은 일제시대에 조선일보 주필과 사장을 역임했고 신간회 총무간사 등으로 활동하면서 9차례에 걸쳐 7년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에는 미 군정청 민정장관과 2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6·25전쟁이 일어난 뒤 납북되어 1965년 3월 1일 평양에서 타계했다.

"조선은 내 나라다. 나의 향토다. 생활의 근거지다. 문화발전의 토대다. 세계로의 발족지(發足地)다. 함께 일어나 지켜야 하고, 싸워야 하고, 고쳐가야 하고, 이를 방해하는 어떤 자들이고 부숴 치워 버려야 할 것이다."

어록비에 새겨진 이 글은 민세 선생이 1926년 12월 5일자 조선일보에 쓴 사설의 일부이다. 1924년 9월 주필 겸 이사로 조선일보에 입사한 민세는 1929년 부사장을 거쳐 1931년 조선일보 6대 사장으로 취임했다. 민세는 조선일보에 재직한 만 8년간 사설 980편, 시평(時評) 470편 등 1450편에 이르는 글을 통해 일제를 비판하고 민족정신의 각성을 촉구했다. 그는 사설 '보석지연(保釋遲延)의 희생(犧牲)' '제남사건(濟南事件)의 벽상관(壁上觀)' 등으로 조선일보 재직 기간에만 4차례 옥고를 치렀다.

9일 독립기념관에서 열린 민세 안재홍 선생 어록비 제막식에서 참석자들이 한글‘민’자를 형상화한 어록비를 살펴보고 있다. 오른쪽 부터 전진규 경기도 의원, 송명호 평택시장, 김문순 조선일보 발행인, 김진현 민세안재홍선생기념사업회 회장, 김주현 독립기념관장.

이날 제막식에서 김진현 민세안재홍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은 기념사를 통해 "신간회를 통해 중도통합을 이루신 민세 선생이 지금 계셨으면 21세기 한국의 중도통합을 어떻게 이루셨을까 생각하게 된다"며 선생의 뜻을 기렸다. 김문순 조선일보 발행인은 축사에서 "일제 경찰이 '조선의 안씨들은 문제가 많다. 안중근 안창호 안재홍…'이라고 했다"는 일화를 소개하며 선생을 추모했다.

어록비는 가장 높은 것이 어른 키를 넘지 않는 아담한 크기의 돌 세 개를 놓아 민세의 '민'자가 되도록 했다. '민'자의 'ㄴ'부분은 벤치처럼 낮게 놓아서 관람객이 편히 앉아 'ㅁ' 부분에 새겨진 민세의 정신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어록비를 설계한 조각가 구성호씨는 "높은 시멘트 좌대를 쓰지 않고 민세 선생처럼 겸손하고 친근한 작품을 만들고자 했다"고 말했다.

어록비 건립은 지난해 12월 민세안재홍선생기념사업회가 발의하고 민세의 고향인 평택시(시장 송명호)가 건립 예산 3000만원을 지원해 이뤄졌다. 민세 어록비 주위에는 이동휘·조소앙·문일평·김마리아·전명운 선생의 어록비가 자리 잡고 있는 등 독립기념관(관장 김주현)에는 민족지사 96명의 시(詩)와 어록이 돌에 새겨져 있다. 이날 제막식에는 민세 선생의 큰며느리 김순경 여사, 손녀인 시인 안혜초씨, 손자 안영돈·영운씨 등 유족과 관계자 60여명이 참석했다. 제막식이 끝날 무렵 이들이 소리 높여 외친 "대한독립 만세" 소리가 흑성산 기슭을 쩌렁쩌렁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