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패스(senior pass)로 어반테라스(urban terrace) 갈 수 있나요?’ 서울시의 외국어 남용을 꼬집는 질문이지만, 사실 ‘외국어 중독’은 서울시만의 문제가 아니다. ‘S라인’, ‘리필’ 등 우리의 일상 대화에서도 외국어가 남용되지만 깨닫지조차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닷컴은 연속 기획으로 한국 사회 전반의 외국어 중독 상태를 진단하고, 그 해결 방안을 모색해 본다/편집자 주

지난해 한국전파진흥원의 '방송콘텐츠제작지원사업' 심사위원을 맡았던 김모(62)씨는 응모작들의 제목을 보고 깜짝 놀랐다. 외국어는 물론 'Dreams Come True', 'Seceodhand Hope' 등 영문 알파벳을 프로그램 제목에 그대로 사용한 경우가 전체 135개 가운데 50개가 넘었기 때문이다.

“다큐, 드라마 등 마땅한 우리말이 없는 것은 제외해도 그 정도였다”는 김씨는 “‘바이오메틱스(bio informatics, 유전정보학)’ 등의 전문용어부터 ‘프리언’처럼 정체불명의 표현까지 난무했다”며 “가제(假題) 단계부터 이러면 본 방송 편성 때에는 더 심각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KBS 인터넷 홈페이지 캡처 화면

방송산업의 특성상 외국어와 외래어의 사용은 불가피하다는 게 중론이다. 하지만 방송언어의 대표격인 프로그램 제목의 외국어 남용은 심각하고, 특히 예능 분야는 ‘영어 제목 아니면 편성이 안 된다’는 말이 나올 지경이다.

지난주(9월21일~9월27일) 1주일 동안 지상파 방송의 시청률 상위 20개 프로그램 중 6개가 우리말 이름이 아니었다. 이 중 KBS 'VJ 특공대'를 제외한 '해피선데이', '개그콘서트', '해피투게더' (이상 KBS), '세상을 바꾸는 퀴즈'(MBC), '패밀리가 떴다'(SBS) 등이 예능 방송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외국어·외래어 남용이 해가 갈수록 심해진다는 것이다. 국립국어원 자료에 의하면 90년대 초반까지 42.2%였던 외국어·외래어 프로그램명은 90년대 후반 54.2%로 늘어나더니 2000년대 초반에는 60.2%에 이르렀다. 이는 사회 다른 분야와 비교해서도 매우 급격한 편이다.

이에 따라 프로그램 제목에 외국어의 소리만을 한글로 적는 경우가 많아졌다. ‘뷰티풀 선데이(beautiful sunday)’, ‘원더플 투나잇(wonderful tonight)’, ‘오버 더 레인보우(over the rainbow)’ 등이 대표적이다. 또 외래어와 외국어가 기존 우리말을 대체하면서 일종의 ‘언어의 계급화’ 우려도 제기됐다. ‘극·방송극’은 ‘드라마’로, ‘이야기’나 ‘환담’은 ‘토크’나 ‘토크쇼’, ‘쟁점’은 ‘이슈’, ‘우스개’는 ‘개그’, ‘행복’은 ‘해피’ 등으로 쓰이면서 영어로 표현해야 품격이 높다는 고정관념이 생긴다는 것이다.

한편 어린이 프로그램의 경우 57%로 전체 평균보다는 낮지만 외국 제작물의 수입이 많고, 컴퓨터 게임과 판타지 소설의 영향으로 질적으로는 크게 악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토리 Go, Go’, ‘쾌걸롱맨 나롱이’, ‘미래영웅 아이언리거’ 등 국적 불명의 제목들이 붙어 어린이들의 언어관에 혼란을 주고 있다.

방송 관계자는 “현실적으로 미국과 일본 방송을 모방하거나 재가공하는 경우가 많아서 제목까지 따라갈 때가 많다”며 “한국을 알리기 위한 특집 제목까지도 ‘아이러브코리아’일 정도였다”고 씁쓸해했다. KBS ‘아침마당’의 작가로 일했던 이모(50)씨는 “요새는 새 프로그램 이름을 우리말로 지으면 ‘센스없다’고 핀잔을 듣는다”며 “‘아침마당’이란 제목도 90년대 초반이니까 가능했지 90년대 후반만 되었어도 힘들었을 것”이라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방송 관계법 규정들만 준수해도 지금보다는 상황이 나아질 것으로 본다. 방송법 제6조 8항은 “방송이 표준말의 보급과 언어순화에 힘써야 한다”고 규정했고,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53조는 “방송은 외국어를 사용할 때는 국어순화의 차원에서 신중하여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립국어원은 ‘방송 프로그램 언어사용 실태 조사 보고서’에서 “방송 프로그램 꼭지 언어 가운데 로마자 약자 유형과 외래어가 2300여가지 정도”라며 “그 중 꽤 굳어지고 익은 말들이지만 고유어로 바꿔쓸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며, 나머지 2000여 가지 역시 손을 대지 못할 만큼 많은 수는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방송 종사자 스스로 공공성을 생각하여 말글을 다루어야 한다”며 “방송위원회 등에서 심의를 강화해 최소한의 기준이나 지침을 내리고 심의·규제하는 것도 한 방편”이라고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