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까지만 해도 외교통상부 안에 여성 외교관 모임이 있었다. 신입 여성 외교관이 들어오면 환영해주고 친목도 다졌다. 그러나 3~4년 전부터 이런 '여성' 모임이 사라졌다고 한다. 여성 외교인력이 대폭 늘어나면서 한꺼번에 모인다는 게 불가능해졌다. 또 여성 외교관들도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모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한다.
현재 외교부의 68개과 중 '남성 100% 과(課)'는 없다. 그러나 최근까지도 북미국, 영사국, 기획조정실의 인사과, 의전 업무 쪽에선 여성 외교관들을 그다지 반기지 않았다. 그래도 조금씩 여성 외교관 수가 늘어나서 요즘엔 북미국의 북미1과에 1명, 2과에 1명, 3과(한미안보협력과)에 2명이 근무하는 등 전 분야에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직원의 50% 이상이 여성인 과가 많은 국제기구국이나 조약국에 비하면 더딘 변화다.
외교부에선 북미국, 동북아국처럼 해당 지역 국가를 상대로 일하는 경우 '지역' 또는 '양자외교' 업무를 한다고 하고, 유엔 등 국제기구를 대상으로 하는 경우 '다자외교'를 한다고 한다. 양자는 한미관계처럼 국가관계를, 다자는 환경, 인권, 에너지 등 특정이슈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현재 여성 외교관들은 다자 외교 업무에 치중돼 있다. 그래서 외교부에선 "여자는 다자외교, 남자는 양자외교"란 말이 나온다.
전통적으로 외교부는 북미국과 동북아국 등 지역외교 중심이었다. 전문가들은 "한·미관계와 북핵문제가 오늘날 한국 외교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90% 가까이 된다"고 말한다. 한·미동맹과 북핵문제에 더해 중국과 일본이 한국 외교의 거의 전부라고 할 정도로 중요했기 때문에 외교관들은 다투어 이 분야에서 일하고 싶어했다. 정상외교와 고위급 대화가 많아 '권력'과 가깝고 언론의 주목도 많이 받았다. '북미과장과 북미국장을 거쳐야 장관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출세코스이기도 했다.
그러나 급격하게 늘어난 여성 외교관들이 새로운 눈으로 외교를 보면서 이 굳은 믿음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정책총괄과의 천의진 서기관은 "한국이 외교로 승부하려면 다자외교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다자안보, 신뢰구축, 개발문제 등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했다.
경력 10년 미만의 여성 외교관들 중 "외교관이란 국제회의에 나가 한국대표로 발언하는 사람이란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고 하는 경우가 많았다. 북미1과의 김지수 서기관은 "여성 동기 중엔 대학시절 외국에 나가본 후 더 큰 무대에서 활동하고 싶다는 꿈을 갖게 돼 외교관을 지망한 경우가 많았다"면서, "그런 꿈은 다자외교 무대에서 활동하는 쪽에 더 가깝다"고 했다. 이들에게 외교란 과거처럼 끈끈한 인맥과 정치력을 발휘해 막후에서 모종의 합의를 하는 방식이 아닌 것이다.
한 고위 외교관은 "장관이 되는 지름길에 집착하는 남성들과 달리 여성 외교관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이슈를 공부할 수 있는 다자외교에도 관심이 많다"고 했다. 국제사회의 중요한 관심사인 기후, 인권, 개발 등을 새로운 시각으로 공부해 그 분야의 전문가로 인정받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유엔과의 윤성미 서기관은 "다자외교는 원칙이 중요하며 업무 내용이 투명하고 예측 가능해 차분하게 공부하면서 일하기 좋은 분야"라고 했다. 북핵정책과의 이윤주 서기관은 "북핵문제의 경우엔 윗사람부터 맨 아랫사람까지 같은 문제를 다루는 팀플레이를 하지만, 다자외교는 이슈별로 작게 쪼개 일할 수 있으므로 실무자가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젊은 외교관들이 도전하기 좋은 것 같다"고 했다.
물론 성별이 적성이나 취향을 정하는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다. 여성 외교관들 중엔 "핵심업무를 담당하는 양자외교 담당 과에서 여성 외교관들에게 문을 활짝 열어주기까진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보는 의견도 있었다. 사람을 골라서 데려갈 수 있는 영향력 있는 과이므로 아직은 남자 외교관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통상도 다자외교 못지않게 여성들의 진출이 많은 분야다. 이혜민 자유무역협정교섭대표는 "협정을 맺으면 본문만 500쪽 정도 되는데 여성들은 치밀해서 그 내용을 꼼꼼하게 따지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했다.
지난 3월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의 한·걸프협력협의회(GCC) FTA 협상을 앞두고 외교부에선 여성 외교관을 대표단에 포함시키지 않으려 했다. 회교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는 여성들이 혼자 외출하기도 어려운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관련 업무를 해온 여성실무자들을 제외시킬 순 없었다. 통상교섭본부의 백윤정 서기관은 "협상장에서도 차도르를 쓰고 있었는데, 상대는 타 문화를 존중하는 태도를 높이 평가하는 눈치였다"고 했다. 여성 외교관들이 가장 접근하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 중동에서도 성별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