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패스(senior pass)로 어반테라스(urban terrace) 갈 수 있나요?' 서울시의 외국어 남용을 꼬집는 질문이지만, 사실 '외국어 중독'은 서울시만의 문제가 아니다. 'S라인', '리필' 등 우리의 일상 대화에서도 외국어가 남용되지만 깨닫지조차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닷컴은 연속 기획으로 한국 사회 전반의 외국어 중독 상태를 진단하고, 그 해결 방안을 모색해 본다/편집자 주
외국어에 중독된 한국 <6> 우유 대신 '밀크(milk)' 파는 백화점
지난 21일 윤모(60)씨는 30년 단골인 S백화점을 찾았다. 1층 현관에서 발레파킹(Valet Parking, 주차대행) 담당 직원에게 차를 맡긴 그녀는 컨시어지 서비스(concierge service, 관문 서비스)에 따라 여성 컨템포러리 캐주얼(contemporary casual, 현대 일상복) 매장을 둘러봤다. 트리니티 라운지(trinity lounge, 백화점 멤버십 카페)에서 차를 마신 윤씨는 슈피터(shoe fitter, 구두 조언가)의 도움을 받아 구두 한 켤레를 구입한 후 지하의 월드구어메(world gourmet, 세계 미식가) 매장을 거쳐 프레쉬마트(fresh mart) 내의 미트(meat) 판매대에서 5-스타(star) 등심을 사서 귀가했다.
미국 뉴욕 배경의 외화 '섹스앤더시티(Sex and the City)'의 한 장면이 아니다. 서울에 사는 한 주부의 백화점 쇼핑이다. 하지만 백화점 곳곳의 명칭은 물론 제공하는 서비스까지 생소한 외국어가 많다. 윤씨는 "요새 백화점에서는 돈만 아니라 영어도 많이 알아야 제대로 대접받는다"며 "집에 판촉물이 오면 아들한테 꼭 물어봐서 공부하고 나온다"고 말했다.
한국 사회 곳곳에 외국어가 남용되고 있지만 백화점은 특히 심각하다. 쓰이는 외국어가 많고 다양한 데다가 어렵기까지 하다.
지난 10일 재개장한 S백화점 강남점의 지하는 매장 명칭이 대부분 외국어다. 음식을 요리해서 파는 델리존(Deli zone), 빵과 과자류를 판매하는 스윗존(sweet zone) 뿐 아니라 기프트 셀렉션(gift selection), 월드구어메(world gourmet), 프리미엄 그로세리(premium grocery)까지 매장명 15개 가운데 우리말은 ‘건강’ 하나밖에 없다.
같은 백화점의 다른 지점에 위치한 프레쉬 마트(fresh mart)는 내부 소매장에 미트(Meat), 데아리(dairy, 유제품) 등 크게 영문 표시를 한 반면 한글은 그 5분의1 정도 크기로 작게 병기했을 뿐이다. 명품 매장으로 유명한 G백화점도 동서로 위치한 두 건물을 동관, 서관이 아닌 이스트(East)관과 웨스트(West)관으로 부르고 있다.
김모(62)씨는 “커피 우유는 어디서 파느냐고 물었더니 밀크(milk)에 있다고 하더라”며 “늘어난 건 일본 관광객이라는데 왜 온통 영어판인지”라며 못마땅해 했다. 초등학생 자녀와 함께 왔다는 이모(37)씨는 “어느 백화점이나 지하만 가면 베지터블(vegetable), 베이커리(bakery) 등 애들 영어 단어 공부하기 딱 좋다”면서도 “구어메(gourmet) 처럼 생소한 단어를 애들이 물어봐서 난처한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백화점 측이 제공하는 각종 서비스는 더욱 난해하다. S백화점 홈페이지에 따르면 이 백화점에는 여성 고객을 위한 슈피터(shoe fitter)와 란제리 피터(lingerie fitter)를 있다. 이들은 구두와 속옷 구매를 전문적으로 도와주는 사람들을 말한다. 또 레스트룸(restroom, 화장실)에는 파우더룸(powder-room, 화장방)이 마련됐고, 베이비 컨설턴트(baby consultant, 유아상담사)도 대기 중이다.
H백화점 역시 최근 고객들의 잔치를 돕는 파티 스타일링 서비스 데스크(party styling service desk)를 열었다고 홍보 중이다. 한편 L백화점의 A관의 홈페이지 초기 화면은 전부 영어로만 꾸며져 외국 백화점을 잘못 찾아온 것이 아닌가 착각할 정도이다.
백화점 홍보 담당자는 “외부에서 입점한 곳들은 고유명칭을 사용하므로 외국어라도 어쩔 수 없다”며 “지하 매장 명칭을 외국어로 하는 것은 다른 시장이나 대형마트 등과의 차별화 목적이 크다”고 설명했다. 또 “‘슈피터’와 ‘란제리 피터’의 경우 일본 백화점의 제도를 수입하면서 그 이름까지 들여온 경우”라며 “마땅한 대체어를 찾지 못해 일단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업무상 백화점을 찾았다가 에르메스(Hermes)를 ‘헤르메스’로 잘못 발음하는 손님을 뒤에서 비웃는 판매원들을 본 적이 있다”는 한 전자회사 마케팅 관계자는 “외국어 사용이 고급화인지도 의문이지만, 결국 고객들의 지적 허영심을 자극하는 상술”이라며 “백화점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 공공성이 있는 만큼 지나친 외국어 명칭은 재고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