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박현철 기자]"선수 생활 동안 시운이 좋았어요. 전 정말 운이 좋은 선수였습니다".

지난 12일 한화 이글스-히어로즈 전이 열린 대전 구장. 5회가 끝난 후 양 팀 선수단과 관중들은 한 스타 플레이어를 위해 기립해 뜨거운 눈물과 박수를 보여주었다.

정민철(37). 1992년 빙그레(한화의 전신)서 데뷔한 이래 그는 이글스 마운드의 기둥으로 맹활약했다. 2년 간의 일본 생활(2000~2001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을 제외한 16시즌 동안 정민철은 한화를 위해 161승(128패 10세이브 평균 자책점 3.51)을 올렸다. 국내 역대 우완 중 가장 많은 승수다.

많은 이의 격려 속에 은퇴식을 치른 정민철은 "더 이상 선수로서의 역할은 수행할 수 없지만 지도자로 이글스 재건을 위해 더욱 노력하겠다"라고 밝혔다. "프로 생활 18년을 마치며 은퇴식을 가진 나는 운이 참 좋은 선수다"라는 말과 함께.

사실 정민철은 우완 최다승 기록을 보유한 투수지만 상과는 인연이 없었다. 그가 프로 생활 동안 거머쥔 타이틀은 4개(1993년 승률 1위, 1994년 평균 자책점 1위, 탈삼진 1위, 1997년 탈삼진 1위)에 불과하다. 시즌 MVP는 물론 투수 부문 골든 글러브 등은 정민철과 인연이 없었다.

데뷔 해에는 롯데 염종석(36)의 활약에 가려졌고 현역 최다승(210승)에 빛나는 송진우(43)가 팀 선배로 자리했다. 현대 정민태(39. 히어로즈 투수 코치)와 해태 이대진(35. KIA)도 별빛을 잡아먹는 햇빛처럼 정민철의 활약상 이상의 성적을 올렸다. 한 시즌의 임팩트 면에서 상대적으로 좋은 점수를 얻지 못했던 선수가 바로 정민철이었기에 혹자는 그를 가리켜 '불운한 에이스'라고 부르기도 했다.

은퇴식이 끝난 후 대전 구장 기자실에 자리한 정민철에게 질문을 던졌다. 신분이 한 순간에 바뀌는 큰 일을 치르고도 정민철은 조리있는 말투와 웃음을 보여주며 감격의 순간들을 떠올렸다.

▲ 한 팀에서 데뷔와 은퇴…가문의 영광

'은퇴식을 치른 것을 축하해야 하는 것인가'라고 묻자 그는 언제나처럼 웃으며 "물론 축하를 받을 일이다"라고 이야기했다. 프로 18년 동안 영욕과 회한의 순간도 있었으나 정민철은 영예로운 은퇴식을 치렀다는 데 더 큰 의미를 두었다.

"처음 2군으로 내려간 뒤 은퇴를 결심할 때는 잠시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김인식 감독님이 처음 부임하셨던 2005년을 떠올린 뒤 '그래도 이만큼 선수 생활을 이어왔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때는 팔꿈치가 너무 아파서 은퇴를 고려했으니. 같은 팀에서 데뷔하고 그 팀에서 은퇴식을 치렀으니 '가문의 영광'입니다".

통산 393경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가 무엇인지에 대해 물어보자 정민철은 자신의 데뷔 첫 승을 떠올렸다. 데뷔 경기이던 1992년 4월 5일 LG전서 김동재(현 KIA 수비코치)에게 만루포를 허용했던 그는 3일 후 광주 해태 전서 6이닝 1피안타 무실점 승리를 거뒀다.

"데뷔 경기서 만루포를 맞으면서 안 좋은 출발을 했었죠. 그리고 나서 3일 후에 해태를 상대로 6이닝 1피안타 무실점으로 선발승을 거뒀어요. 무엇보다 당시 최강팀이던 해태를 상대로 쾌투를 펼쳐 승리했다는 게 가장 기뻤습니다".

▲ 팀 전력이 갖춰진 시기에 데뷔…정말 운이 좋았다

한 시즌 짜리 대형 임팩트를 자주 남기지는 않았으나 정민철에게는 '꾸준함'이라는 무기가 있었다. 1992년부터 1999시즌까지 매년 한 시즌 두 자릿수 승리(고졸 신인 최장기록)를 거두며 데뷔 8시즌 만에 100승 고지를 돌파한 것은 분명 엄지 손가락을 추켜세울 만 했다.

특히 정민철은 통산 20완봉승(역대 2위)에 49번의 완투승을 기록했으며 역대 상위 10명의 투수 중 유일한 1970년대 출생자다. 투수 분업화가 정착된 현재 완투형 투수들이 점차 희귀해지고 있는 만큼 정민철의 은퇴는 야구 팬들에게 더 큰 아쉬움을 사고 있다.

꾸준한 활약을 보여줬던 90년대 당시에 대해 이야기하자 그는 손사래를 치며 자신의 운이 좋았다고 밝혔다. 팀 컬러가 확실해졌던 시기에 데뷔한 후 꾸준하게 확실한 타선 지원을 받았다는 것이 정민철의 이야기였다.

"우리 팀 타선을 가리켜 '다이너마이트 타선'이라고 하잖아요. 제가 데뷔할 때가 '다이너 마이트 타선'이라는 별명이 나왔던 시기입니다. 마운드에서 일단 버티고 있으면 타선 지원이 워낙 좋아서 버티면 이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뒤이어 그는 "상복은 없었지만 팀이 창단 첫 우승의 감격을 누릴 때 그 현장에 있었다. 얼마나 운이 좋은가"라며 감격을 표했다. 1999년 한화가 롯데를 꺾고 한국 시리즈를 제패했을 때 그 또한 18승을 거두며 자신의 한 시즌 최다승 기록을 세웠다. 자아 실현과 팀 우승이 함께 했던 때를 떠올리며 정민철은 더욱 밝게 웃어보였다.

"정말 드라마같은 삶을 살았던 것 같아요. 1999년 포스트 시즌 막차를 탄 팀이 한국 시리즈까지 제패하며 제게 일본행 기회를 주었고 4년 전 팔꿈치가 아플 때는 김인식 감독님이 오셔서 기회를 얻었잖아요. 장종훈(한화 2군 타격코치) 선배의 35번 옆에 제가 달던 23번이 위치해도 되는지. 감사한 마음 뿐입니다".

팀 우승을 이끈 뒤 요미우리 이적을 택한 정민철은 2년 통산 3승 2패 평균 자책점 4.70의 초라한 성적표를 남기는 데 그쳤다. 2000년 6월 14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스를 상대로 7피안타 무실점 완봉승을 거두는 활약을 보여주기도 했으나 부상 등으로 인해 제 실력을 뽐내지 못하고 '실패한 외국인 선수'가 된 바 있다.

"다들 일본 진출을 결정한 데 대해 후회하지 않느냐고 물어보더라구요. 절대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잃은 것도 있지만 제가 뛰고 싶은 무대를 밟아봤다는 도전 정신을 발휘했으니. 2년 외유 후 국내 무대서 고전하며 힘들기도 했습니다만 지금 생각해봐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 55번을 '영구결번'으로 택하지 않은 이유

사실 정민철이 최전성기를 구사하던 시절 달았던 등번호는 23번이 아니었다. 빙그레 특유의 줄무늬 유니폼과 흰색과 빨간색이 조화된 한화 초기 유니폼까지. 정민철의 옛 사진에는 55번이 달려 있었다.

23번은 정민철이 2005년부터 달았던 등번호다. 정민철이 23번으로 배번을 바꾼 후 55번은 대전고 후배 윤규진(25)에게 돌아갔다. 데뷔 이후 한화의 불펜 핵 중 한 명으로 힘을 더했던 윤규진은 현재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인해 2군에서 제 컨디션을 찾는 데 주력하고 있다.

다른 이에게 되도록 폐를 끼치지 않고자 하는 정민철의 성격 상 후배가 달고 있는 55번을 영구결번으로 택하지 않은 사실은 당연해보였다. 그러나 55번으로 떨쳤던 그의 꾸준한 위력이 워낙 대단했기에 그에 대한 구체적인 답변을 듣고 싶었다.

"55번은 제게 커다란 의미가 있는 번호입니다. 그러나 제 고교 후배인 (윤)규진이의 현재 번호이기 때문에 그 번호를 뺏어서 영구 결번 처리할 수는 없잖아요. 제가 은퇴한 이후에도 우리 한화 팬들이 규진이의 맹활약을 보면서 저를 추억할 수 있다면, 그러면 된 겁니다. 그리고 23번도 제게는 너무나 소중한 번호에요".

정민철은 2005시즌을 앞두고 모든 것을 바꾼다는 의미로 23번을 택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팔꿈치가 너무 아파 선수 생활의 기로에 섰던 때다. 김인식 감독을 만나 다시 스파이크 끈을 동여맨 정민철은 23번을 달고 기교파 투수로 변신해 지난해까지 4년 간 34승을 거뒀다. 특히 2007년에는 12승 5패 평균 자책점 2.90의 호성적으로 3년 연속 포스트 시즌 진출에 공헌했다.

"감독님께는 너무 죄송하고 송구해서 어떻게 드릴 말씀이 없을 정도입니다. 제가 2005년부터 다시 제대로 마운드에 설 수 있던 기회를 만들어 주셨으니까요. 앞으로 선수로서 기회는 사라졌지만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꼭 그 기회를 살리고 싶어요. 자식이 부모님께 당연히 해야하는 '효도'처럼요".

▲ 후배들에 대한 정민철의 조언

지난 7월 8일 플레잉코치로 임명된 이후 정민철은 2군 선수들과 함께 하며 '초보 코치'의 삶을 살고 있다. 두 달 넘게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는 2군 스케쥴을 계속 하다보니 적응이 된다는 것이 그의 이야기였다.

"오전 8시부터 오후 8시까지 계속 2군 선수단과 함께 하고 있어요. 1군 때와 달라 힘이 들기도 하는 데 제가 원래 적응을 잘하잖아요.(웃음) 저녁 8시가 넘어 집으로 돌아와 TV를 틀면 경기 중,후반부가 화면에 비치고. 집에 누워서 야구를 보는 순간 '아, 이제 내가 야구공을 손에서 놓았구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탁월한 기량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정민철 코치에게 후배들에 대한 조언을 요청했다. 지도자 정민철은 자신도 현역 시절 후배들을 보고 배운 것이 많다는 이야기를 꺼내는 동시에 앞으로 유망주들이 걸어야 할 길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그동안 선수 생활을 하면서 후배들을 보고 배운 것도 많습니다. 최근에는 류현진(22)이나 안영명(25) 같이 좋은 후배들을 보면서 저도 많이 느끼고 배우게 되더라구요. 그러나 좋은 기량을 갖춘 후배들이 정형화된 로케이션에 따라 던지는 등 틀에 박힌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으면 합니다".

뒤이어 정민철은 송진우의 예를 들며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동시에 경기 내용 면에서도 담력을 확실하게 발휘하는 후배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을 이야기했다. 순간적인 재치를 통한 창의적인 경기 운영 능력의 필요성과 끊임 없는 자기 계발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기량이 좋은 젊은 선수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다만 틀에 박힌 스타일로 더 나은 성적을 내지 못하는 경우도 보게 되어 아쉽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어요. 마운드에서 상대의 허를 찌를 수 있는 과감함과 재치를 발휘해줬으면 합니다. 특히 (송)진우 형 같은 경우는 항상 열심히 노력하면서 백 도어 슬라이더 같은 무기를 추가해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했잖습니까. 그런 과정 속에 좋은 후배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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