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 발명왕, 특허왕, 해외 자원봉사 활동, 경시대회 입상…. 입학사정관 전형에 합격하려면 필수 코스쯤으로 여겨지는 스펙(조건)들이다. 카이스트(KAIST)가 지난달 전국 고교의 교장 추천을 받아 150명을 뽑은 입학사정관 전형에서도 이 같은 화려한 스펙을 가진 학생들이 다수 포함됐다.
하지만 평범한 스펙의 평범한 합격자들도 적지 않았다. 어려운 집안 환경 때문에 사교육 없이 혼자 공부해 전교 30위권 성적을 유지한 학생, 시간을 쪼개 반 친구들의 수학 공부 도우미로 봉사한 학생, 2년간 꾸준히 과학 스크랩북을 정리한 학생 등이 합격자 명단에 포함됐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과 잠재력을 본다"는 입학사정관의 취지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평범한 스펙으로 카이스트의 관문을 통과한 3명 합격생의 비결을 추적해보자.
◆친구들의 수학 도우미
부산 경혜여고 3학년 유연이(17)양은 "특이하게 잘하는 것이 없어도 합격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말했다. 유양은 경시대회에 나가 수상한 적도 없고, 특이한 동아리 활동을 하지도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합격했을까. 정인곤 경혜여고 교장은 "유양은 매사에 누구보다 긍정적이고, 특히 과학 등 좋아하는 과목에는 진심으로 흥미를 느끼는 학생"이라고 말했다.
유양이 입학사정관 전형에 지원하기 위해 준비한 서류목록 대부분은 지금까지 학교에서 했던 활동과 교육청 무료 수리과학논술 토요 특강 등에서 쓴 글 등이었다. 평소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콘셉트였다.
특히 카이스트 입학사정관들의 마음을 산 것은 의외의 곳에 있었다. 지난 2년간 묵묵히 맡아온 '수학반장'이었다. 유양은 2년 전부터 일주일에 두 번 새벽같이 나와 정규수업 전 자율학습 시간에 같은 반 친구들에게 수학을 가르쳐주는 '교사' 역할을 해왔다. 친구들 눈높이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각자의 수준 차에 맞춰 '꼭 풀어야 할 문제'와 '도전할 문제'로 나눠 프린트물을 만들어 도와줬다. 본인 입시 준비에 경황이 없을 고3이 되어서도 변함없었다.
유양은 자기소개서 '중·고교 재학 중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활동을 쓰라'는 부분에도 수학반장 이력을 적었다. 유양의 학교를 방문 심사한 카이스트 임명환 사정관은 "유양은 자신의 시간을 할애해 친구들을 가르치면서도 손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 속에서 본인 스스로 배울 점을 찾아내고 있었다"며 "이게 바로 우리가 원하던 리더십과 봉사정신"이라고 말했다.
◆히스토리가 있는 공부
동국대사대부고 오장섭(17)군 역시 과학을 좋아하긴 했지만, 카이스트 도전은 생각도 못했다. 전교 수석도 아니었고, 경시대회 수상도, 별다른 대외 활동 경력도 없었다. 하지만 동대부고는 형식적이지 않은 심층면접과 서류전형 등 3단계의 꼼꼼한 전형을 거쳐 오군을 학교 대표로 뽑아 카이스트에 추천했고, 카이스트는 그런 오군의 잠재력을 인정했다.
3학년 진학지도부장 김재욱 교사는 "면접을 진행하며 학생부 기록만으로는 도저히 담기 힘든 개별학생들의 장점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며 "그런 차원에서 오군의 잠재력을 만장일치로 인정해 추천한 것"이라고 말했다.
오군의 최대 장점은 스스로 궁금증을 찾아내 직접 도서관을 찾거나 인터넷을 뒤져 풀어가는 방식이었다고 교사들은 전했다. 학원에서 외워야 할 목록을 받아와 암기하는 방식과는 확실히 달랐다는 얘기였다. 담임 임상선 교사(국어)는 "오군은 과제물을 내주면 주어진 내용뿐 아니라 한 단계 더 나아가 고민하는 자기주도적 학습을 할 줄 아는 학생이었다"고 말했다.
오군은 카이스트에 2년간 꾸준히 해온 과학 스크랩북 2권을 제출했고, 이것이 그를 차별화시켰다. 평소 궁금했던 내용을 인터넷이나 책을 찾아 읽으면서 스크랩해온 것이었다. 오군을 방문 평가했던 카이스트 A교수(입학사정관)는 "점수를 따기 위해 공부한 게 아니라 자신이 즐기면서 공부했고, 또 그 노력의 히스토리(역사)까지 엿볼 수 있는 확실한 증거물이었다"고 말했다.
오군이 부모님과 함께 2년 전부터 독거노인을 찾아가 말벗이 되어준 이력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A교수는 "봉사활동 경력으로만 따지면 지원자 중에는 오군보다 나은 학생이 수없이 많지만 중요한 것은 시간이 아니다"라며 "오군에게 봉사활동을 하면서 느끼고 배운 점에 대해 물으면서 오군의 삶에 대한 태도를 봤다"고 밝혔다.
◆사교육 안 받은 전교 30등
서울 강남 소재 B고의 이모(18)군은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옥탑방에서 살면서 과외 한번 받지 않고 공부해 전교 30위권을 유지해왔다. 이름이 알려지는 것을 극구 사양한 이군이 합격한 비결은 '주어진 환경'을 감안한 잠재력 평가에 있었다.
B고는 각 대학의 입학사정관 전형에 보낼 '학교 대표'를 선정하기 위해 자난해 8월 교사 5명과 학부모 대표 1명으로 추천위원회를 만들었다. 추천위원들은 보안(保安) 서약을 하고 학생들이 제출한 자기소개서, 지원서 등을 집에 가져가 검토에 검토를 거듭했다.
추천위원장을 맡은 오세목 교감은 "단순히 성적순으로 선정하면 안 된다고 보고, 교사·학부모들과 머리를 맞대고 한 달 이상 고민하다 보니 자연스레 공감대가 형성됐다"면서 "어려운 환경에서 최고의 성과를 내는 이군을 카이스트 후보로 만장일치로 뽑았다"고 말했다. 당시 전교 1·2등 학생도 지원했지만 이군에게 밀렸다.
카이스트의 평가도 마찬가지였다. 이군 면접을 한 임명환 카이스트 입학사정관은 "주변 친구들 대부분이 다니는 학원을 본인은 근처에도 못 가본 상황에서 상위권 성적을 유지한 것이 주어진 환경에서 스스로 노력할 줄 안다는 점을 입증하는 것"이라며 "동아리(산악부) 활동을 아주 열심히 한 점도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화려한 스펙보다는 면접 때 드러나는 열정과 인성이 더 중요한 요소"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