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개의 IP에 대해 익스플로잇(exploit·공격용 소스 코드)을 시작합니다."
붉은 경고 문구가 깜빡거렸다. 5초가 지났을까. 최영남(23·부산 동명대 정보통신공학3)씨의 컴퓨터 화면에 누군가의 인터넷 뱅킹 화면이 떴다.
"제가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좀비 PC'가 된 겁니다. 예금된 돈 전부를 흔적도 없이 빼낼 수 있습니다. 이 정도면 중급 이상의 해킹 기술입니다."
최씨는 자신만만했다. 그가 마우스를 한 번 클릭하자 공격이 중단됐지만, 상대방은 어떤 낌새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12일 오후 2시30분, 서울 양재동의 정보 보안업체 '터보테크'. 전산망을 뚫으려는 '창'과 지켜내려는 '방패'가 치열한 실전 전투를 벌이는 현장이다.
최씨는 전자회로 해킹의 '고수(高手)'다. 전자 회로의 신호 흐름을 바꿔 정보를 얻어내는 방식이다. 형편이 어려웠던 그는 인터넷망을 가설하는 아르바이트부터 카오디오 회사 서버 관리, 신문과 우유 배달 등 안 해 본 일이 없다. 환경은 열악했지만 "100시간 동안 눈을 붙이지 않고 컴퓨터에 매달렸던" 열정과 근성을 바탕으로 작년 7월 터보테크의 정규직 사원이 됐다.
그는 자신을 '화이트 해커(white hacker)'라고 했다. 국가와 사회를 위해 해킹 실력을 사용한다며, 불법을 마다하지 않고 금전적 이득을 취하는 '블랙 해커(black hacker)'와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했다.
"돈 줄 테니 불법 해킹을 해 달라는 의뢰도 숱하게 받았습니다. 인터넷 도박 사이트에 들어가 상대방의 패를 읽어주면 2000만원 주겠다는 은밀한 제의도 있었죠. 달콤하지만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죽음에 이르는 독(毒)이지요."
최씨의 동료 김호빈(22·숭실대 컴퓨터학부3), 심준보(27·충남대 정보통신공학부4)씨는 국내외 해킹 대회에서 단골로 수상한 고수들이다. 낮에는 강의를 듣고 저녁부터 새벽까지 온라인 네트워크를 누비는 '주독야경(晝讀夜耕)' 생활을 한다.
이들의 '임무'는 국가 기관이나 기업체의 전산망을 뚫고 시스템의 핵심에 도달하는 것. 하는 일은 블랙 해커와 별반 다르지 않지만 해킹으로 얻은 정보를 사용하는 방식에서 극명하게 갈린다. 해당 기관이 까맣게 모르고 있는 정보 네트워크의 '빈틈'과 '구멍'을 찾아내 보안 시스템을 스스로 강화하도록 매서운 자극을 주는 것이다.
김씨는 "전산망을 해킹하다 보면 재정 운용계획, 임원들의 인사 기록 카드, 장·단기 기획안 같은 기업체의 핵심 고급 정보들이 무방비 상태로 노출돼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했다. "이런 게 외국 해커들에게 넘어가면 어떻게 될까. 생각만 해도 가슴 철렁한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키보드로 명령 메시지를 쉴 새 없이 입력하던 김씨가 갑자기 암호 같은 질문을 던졌다. "페도라 코어3 리모트 버퍼 오버플로(Fedora Core3 Remote Buffer Overflow)를 해 봤습니까? 해커들이 구사하는 공격 수준 가운데 최상위급이죠. 서너 마디만 나눠봐도 상대의 내공을 훤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권석철(39) 부사장은 "보통 해커들은 신분을 감추려는 습성이 있지만, 자기보다 실력이 월등히 뛰어난 상대를 만나면 기술 하나라도 더 배우려 발가벗고 달려든다"며 "이들이 많지 않은 급여에도 입사를 결정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해커들은 합법과 불법의 좁은 담 위를 위태롭게 걷고 있다"면서 "어떤 멘토가 이들을 이끌어 주느냐가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권 부사장은 국내의 실력파 해커의 숫자를 100여명 정도로 추산했다. 블랙 해커와 화이트 해커의 비율은 50대 50 정도라고 했다. 그는 '화이트 해커 10만 양병설'을 이야기했다.
"이번 디도스 사태에서 확인했듯이 우리의 보안 수준과 의식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취약합니다. 해커를 잡는 것은 결국 해커일 수밖에 없습니다. 해커의 마음은 해커가 가장 잘 알기 때문이죠. 정부가 중요성을 인식하고 화이트 해커 양성에 나서야 합니다. 엄청난 피해를 보고 나서야 뒤늦게 부랴부랴 나서는 것, 이젠 그만 할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