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식·진념(전 부총리), 김기팔·박재삼·이성부·정현종·조지훈·최일남(문인), 정영일·이규태·남재희·손세일·김중배·염재용·강성구·홍두표·최종율(언론인), 김재형·박근형·백일섭·이순재·최불암·김성겸·변희봉·오지명·배한성·황인용·김종결·박병호·연규진·정해창·표재순(방송인), 조용만(고려대 교수), 이구열(미술평론가), 장일남(작곡가), 김대벽(사진작가)…. 이 인사들의 공통점은 '사직골 대머리집'에 외상을 달고 술을 마신 적이 있다는 것이다.

1950·60년대 인텔리 주당들의 풍모와 술집 풍속을 투영한 술집 외상장부가 28일 공개됐다. 1910년 이전부터 1978년 10월까지 서울 사직동에서 영업했던 명월옥(明月屋) 외상장부로,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될 '작품'이다. 명월옥은 사장 두 명이 경영했던 술집으로, 김영덕씨가 50년, 그의 사위 이종근씨가 20년쯤 맡았다고 한다. '대머리집'은 정식 옥호인 '명월'이 주는 연상작용에다 두 사장의 머리숱이 성긴 데서 고객들이 붙인 애칭이라고 한다. 주메뉴는 막걸리·소주·생선찌개·생선구이·묵무침·두부구이 같은 서민 식단이었다.

외상장부 작성시기는 1950년대 말부터 62년까지로 소속 기관·이름·날짜·외상값이 펜·연필로 깨알같이 적혀 있다. 박현욱 서울역사박물관 전시운영과장은 "소속 기관·인명을 먼저 분류해 놓고 날짜와 외상금액을 적은 것으로 봐 단골손님이 무척 많았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30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시작되는‘광화문 年歌(연가): 시계를 되돌리다’전시회 에서 소개될 사직골 대머리집 외상장부.

장부에 적힌 기관은 71개로 경제기획원·문교부·서울시청 등 공공기관 25개, 조선일보·동아일보·서울신문·동양방송·문화방송 등 언론기관 22개, 서울대·연세대·고려대·이화여대 등 학교 16개와 조흥은행 같은 금융기관 등이다. 장부에 기재된 외상 손님만 300명이고, 외상값은 대개 1000~3000환이다. 1만환이 넘는 경우는 회식 후 한 사람 이름으로 외상을 그은 것으로 추정된다.

외상장부는 당대의 무한(無限) 신뢰와 인간미를 유추하게 한다. 이미 외상을 달아 놓은 손님이나 뚜렷한 벌이가 없는 과객한테까지 외상술을 허(許)했고, '할부 변제'마저 가능했음이 기록돼 있어서다. 장부에는 '필운동 건달' '대합 좋아하는 人(인)' 같은 암어(暗語)가 기재돼 있고, 외상 내역을 좇다 보면 한 개인이 직장을 옮겨간 이적(移籍) 경로가 파악되기도 한다.

이 귀한 기록을 마지막 사장 이씨로부터 건네받아 고이 보관해온 이는 희곡·방송작가이자 이 집 단골 조성현(67)씨다. 조씨는 "희귀 민간 상업사(史)로서 가치가 있다고 여겨 '이 형, 끔찍하게 보관해 주시오'라고 무례하게 주문하곤 했는데 고맙게도 내게 분양해줬다"고 말했다. 당시 조덕송·이원홍(언론인)씨도 장부에 탐을 내 경쟁에 불붙기 직전이었다고 한다.

대머리집은 방 2개와 마당에 술상을 볼 수 있어 손님 50명이 빼곡히 찰 수 있는 한옥 구조였다가 이후 콘크리트로 개조됐다고 한다. 하지만 1970년대 경제 상황이 나아지고 고객들 주머니에 돈이 차면서 쇠락의 길을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씨는 "광화문 일대에서 일하던 언론인들이 교유(交遊)했던 문화 사랑방으로 심지어 특종기사까지 나눠 가졌을 만큼 정감 어린 곳이었다"고 회고했다. 백일섭(탤런트)씨는 "그곳 손님들이 주로 나이 지긋하고 공부 많이 하신 진정한 애주가들이어서 당시 어린 축이었던 나로선 괜스레 주눅 들고 엄숙해져 목소리도 크게 못 냈다"며 "훌륭한 작품들이 태동한 공간이었다"고 말했다.

외상장부는 모두 세 권이다. 한 권은 술집 보관용, 다른 두 권은 수금을 위한 휴대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금을 맡은 이 사장과 그보다 열 살쯤 많은 처당숙이 월급날에 맞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방향을 하나씩 맡아 외상값을 걷으러 다녔다고 한다.

서울역사박물관측은 명월옥 사장 후손들을 백방으로 찾았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이 자료는 30일부터 오는 9월 20일까지 계속되는 '광화문 年歌(연가): 시계를 되돌리다' 전시회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