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각 종목에는 스타들이 즐비합니다. 셀 수 없을 정도겠지요. 그러나 과연 레전드도 그리 많을까요. '레전드(전설)'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1% 이내의 초대형 거물급 선수들. 그들의 현역 시절은 대체 얼마나 찬란했을까요.

스포츠조선이 새 기획물 '레전드, 그들을 말한다'를 통해 그 궁금증을 풀어드립니다. 종전에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단순 설명식의 인물 평전이 아닙니다. 현역 시절 그와 직접 맞붙었던 선수 출신 인사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인터뷰해서 그들의 '체험담'을 통해 레전드의 실체를 가감없이 알려드립니다.



생애 1647 이닝 동안 맞은 홈런은 고작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투수를 꼽자면, 역시 대답은 '선동열'로 귀결되지 않을까.

통산 367경기 출전, 146승(40패) 132세이브, 방어율 1.20. 통산 방어율은 지금도 놀랍다. 이닝당 출루허용률(WHIP) 0.80, 9이닝당 삼진율 9.28, 피안타율 1할7푼3리 등 레전드 중의 레전드라 불릴 만한 성적을 남긴 투수다. 1647이닝을 던지는 동안 피홈런은 겨우 28개 뿐이었다. 많이 맞는 투수들은 한 시즌에도 30개를 채운다.

'레전드, 그들을 말한다'의 첫번째 주인공은 '투수 선동열'이다. 7월20일부터 일주일간 현역 시절 선동열의 공을 겪었던 당대 최고의 스타들로부터 그들의 경험을 채집할 수 있었다.



김재박 등 당대 최고의 스타들도 '두려움의 대상'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

김재박 LG 감독의 기억은 명료했다. "내가 경험했던 투수중 가장 두려웠다. 골프의 뱀샷과 비슷한 투구다. 바로 앞에서 땅밑으로 깔려오는데, 정말 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유승안 경찰청 감독의 증언은 강도가 더 세다. 유 감독은 "공포 그 자체였다"고 회고했다. 유 감독은 "몸쪽 공을 잘 못던지는 투수였다는 평도 있는데 그건 말이 안 된다. 스리쿼터 비슷하게 팔이 나오면서 앞으로 쭉 나와 던지는 스타일이었다. 타자들이 공포를 느끼니 멀찌감치 어깨 빼고 서있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바깥쪽 공도 타자에겐 꼭 몸쪽처럼 느껴진다. 그러니 선동열은 몸쪽으로 던질 필요조차 없었다"고 덧붙였다.

선동열은 무서운 마무리의 상징인 '퇴근 본능'을 일깨우는 원조 투수였다. 본격적으로 마무리를 맡기 시작한 93년부터 경기 후반 불펜에서 몸을 풀기 시작하면 상대 벤치에선 "야, 짐싸자. 경기 끝났다"는 반응이 실제로 나왔다.

이만수 SK 코치는 "그다지 기억나는 게 없다. 내가 잘 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홈런도 없다.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전성기 실력이라면 지금 프로야구에서도 에이스로 통할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지금 던져도 에이스

김광림 두산 코치는 "지금 현역 중에서도 선 감독의 직구를 앞서는 투수를 찾아볼 수 없다"고 말했다. 윤석환 두산 코치는 아예 "(SK) 김광현은 선 감독에 비하면 10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고 했다. 한문연 롯데 코치는 "류현진과 김광현 모두 한수 아래"라고 평가하며 "요즘 투수들은 초속과 종속 차이가 10㎞ 이상 난다. 선 감독은 5㎞ 정도밖에 차이가 안 나는 수준이었다"고 증언했다.

박정태 롯데 코치의 현역 시절 별명은 '탱크'였다. 박 코치는 "(탱크인) 나조차 움츠리게 만들었다. 선동열 선배 공을 잘 못쳤다. 라이징패스트볼이 떠서 들어오니 내 스윙 궤적과 맞지 않아 힘들었다"고 말했다.

김광림 코치는 "해태가 2점쯤 앞서고 있으면 일부러 선 감독을 몸풀게 했다. 그러면 우리쪽에선 지레 겁먹고 필승조 투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래도 임자는 있다

김성래 SK 코치는 "선 감독이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79년 내가 경북고 3학년 때 광주일고 2학년 선동열을 상대로 홈런을 쳤다. 그래서인지 난 특별히 선 감독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물론 다른 타자들은 선 감독만 나왔다고 하면 고개를 저었다"고 말했다.

이정훈 천안북일고 감독은 김성래 코치와 함께 현역 시절 선동열의 공을 잘 쳤던 타자로 손꼽힌다. 이 감독은 "신인 시절엔 동열이형한테 많이 당했다. 내 코앞에서 던지는 것 같으니 중압감이 대단했다. 그 공을 쳐야 최고타자란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생각에 승부근성이 발동했다. 힘으론 도저히 힘들 것 같아 게스히팅을 했다. 배트스피드에는 자신 있었다. 선동열 선배가 일본 가기 전에 신문에 기고를 한 적이 있는데 '이정훈이 가장 어려운 타자다'라고 해서 기뻤던 기억이 있다"고 설명했다.

김광림 코치는 "선 감독이 고려대 1년 후배여서 그런지 나는 비교적 편안 마음으로 타석에 섰다. 한경기에 홈런을 포함해서 5안타를 친 기억도 있다. 내 스윙 타이밍과 맞았던 것 같다"고 했다.

박노준 SBS 해설위원은 "선린상고 2학년때 광주일고와의 경기에서 선 감독님에게 홈런 포함해서 3안타를 쳤다. 그게 자신감이 됐는지 몰라도 프로에서도 상대 타율이 나쁘지 않았던 걸로 기억난다. 물론 최고 투수였다. 연속으로 삼진 3개를 먹은 적도 있었다"고 했다.

▶그에게 홈런을 빼앗은 타자들

역대 24명의 타자가 선동열로부터 28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빙그레 전대영, 삼성 박승호, 태평양 김동기, 삼성 류중일 4명이 2홈런씩을 기록했다.

류중일 삼성 코치는 "홈런 두 개 친 건 그 당시 선 감독님이 컨디션이 안 좋았던 모양이다.(웃음) 평소엔 손도 못 댔다. 안타도 별로 없었다. 만루홈런을 쳤을 때에는 최고투수를 상대로 뽑았으니 정말 기분이 좋았다"고 말했다.

윤동균 KBO 경기감독관은 86년 3월29일 경기에서 선동열을 상대로 솔로홈런을 친 기억을 더듬었다. 윤 감독관은 "이것 저것 노려서는 칠 수 없는 상대였다. 난 직구에 비교적 강했기 때문에 직구를 노리고 쳤던 게 넘어갔다"고 기억해냈다.

장종훈 한화 코치는 선 감독 보다 어리지만 동시대를 풍미했던 대형타자였다. 장 코치는 "독보적이었다. 공략이 결코 쉽지 않았다"면서 한편으로는 "그런 투수가 각 팀에 한명씩 있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다. 타자들이 적응했을지도 모른다. 다 고만고만한 투수였는데 (선 감독은) 워낙 특출났다"고 말했다.

▶행복했던 해태 선수들

김용희 SBS스포츠 해설위원은 "선동열은 공만 좋은 게 아니라 영리한 투수였다"며 "컨디션 나쁠 때는 평소 안 던지던 커브를 가끔 섞어서 타자들의 스트라이크존을 흔들었다"고 말했다.

김 위원은 "선감독 상대로 잘 친 타자가 얼마나 될까. 어떻게든 안타 하나 쳐보려고 급급했다. 선동열과 상대 안한 해태 선수들은 행복했을 것"이라고 했다.

11시즌을 해태에서 함께 뛴 동기생 이순철 MBC ESPN 해설위원은 "선 감독의 슬라이더는 슬라이더라 부르면 안 된다. 그건 슬러브(슬라이더+커브)였다"고 단언했다. 그만큼 빠르면서도 낙차가 컸다는 소리다. "고교 시절에는 선 감독에게 끝내기 홈런을 친 적도 있다. 그런데 내가 연세대에, 선 감독이 고려대로 진학한 뒤에는 완패했다"고 말했다.

한대화 삼성 코치는 86년 OB에서 해태로 이적한 뒤 93년까지 뛰었다. LG 시절인 94, 95시즌을 회상한 한 코치는 "일반 투수들의 슬라이더가 투툭 하고 휜다면, 선 감독의 슬라이더는 후투툭 하고 휘면서 떨어졌다. 브레이크가 엄청났다. LG로 옮긴 뒤 상대할 때에는 타석 들어가는 게 괴로울 뿐이었다"고 했다.

KIA 이종범은 "현역중 선동열 선배 만한 투수가 없다. 유격수 수비하면서 선동열 선배가 던지는 걸 보면 공이 붕 뜨는 것 같았다"고 증언했다.

주니치 시절 팀동료였던 SK 일본인투수 카도쿠라는 "고속슬라이더를 던지면서 컨트롤도 대단했다. 처음엔 그냥 공만 빠른 투수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왜 한국의 슈퍼스타였는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95년 새내기들의 기억

선동열은 한국에서 95년까지 뛰었다. 그해 입단 선수들에게 선 감독에 관한 기억을 질문했다.

95년 롯데 입단인 마해영 Xports 해설위원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프로 데뷔후 첫 안타 상대가 선 감독님이었다. 데뷔하고 첫 원정서 안타 없이 홈으로 돌아왔는데 그때 선 감독님으로부터 첫 안타를 기록했다. 마무리투수라 많이는 못 만났고 1년간 6타수 2안타였다. 난 신인이니까 대투수를 만나 못쳐도 아쉬울 게 없다는 당당한 생각으로 타석에 섰다. 레벨이 다른 투수다"라고 말했다.

역시 95년 입단한 삼성 김재걸은 "워낙 공이 빠르니까 타이밍을 앞에 놓고 친다고 생각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딱 한번 제대로 임팩트가 된 것 같아 걸렸다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타구는 1루 덕아웃 위로 날아갔다. 속으로 '헉' 했다. 나한테 슬라이더도 던지지 않았다. 그냥 직구만 계속 날아왔던 것 같다"며 웃었다.

마지막으로 92년 데뷔한 강성우 삼성 코치의 증언. "롯데 시절에 안타 한 개를 친 기억이 있다. 직구인줄 알고 휘둘렀는데 얼떨결에 우익수쪽 빗맞은 안타가 나왔다. 난 직구인 줄 알았다. 그런데 슬라이더였다. 138㎞짜리 슬라이더. 그만하면 말 다한 것 아닌가. 불펜에서 몸푸는 게 보이면 어이쿠, 빨리 점수내야 하는데 큰일이라는 생각 뿐이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