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뒤에는 헤이그 특사의 부사(副使)격인 이준의 죽음이 신문에 보도되어 온 나라를 들끓게 했다. 전 평리원(平理院) 검사 이준은 일본의 사주를 받은 열강의 대표들이 회의장에 입장을 거부하자 숙사로 돌아와 분사(憤死)한 것이었으나, 세간에는 자결로 소문이 났다. 나중에는 회의장에서 스스로 배를 갈라 열강의 대표들에게 창자를 흩뿌리며 죽어간 것으로까지 각색되어 듣는 이를 더욱 격동시켰다.
안중근도 이준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준은 안중근이 국채 보상운동에 참여하게 되면서 먼빛으로 여러 번 본 적이 있었고, 그 해 서울로 올라와서는 안창호의 소개로 서로 인사까지 한 적이 있었다. 거기다가 안창호나 양기탁과 왕래가 잦은 것으로 미루어 신민회와도 관련이 있어 보였다. 비록 안중근의 기질에는 자결이란 죽음의 방식이 탐탁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수만리 이국에서 서양 열강의 대표들을 꾸짖으며 장렬하게 죽어간 그 기상만은 우러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준의 자진 소식에 이어 이완용이 이끄는 꼭두각시 내각이 광무황제의 퇴위를 획책하고 있다는 소식이 장안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특히 대신으로 있던 송병준은 황제에게 권총을 들이대며 자결하거나 일본으로 건너가 천황에게 사죄하라고 강요했다는 소문이 나돌자 충의를 말하는 지사들은 모두 이를 갈았다. 일진회와 악연을 주고받으며 송병준을 잘 알고 있는 안중근도 그 말을 듣자 치를 떨었다.
그때쯤은 김동억도 병석을 털고 일어났으나, 다동 김달하의 집을 드나드는 지사들 중에도 안중근의 국외 망명을 말리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구태여 멀리서 싸울 곳을 찾을 까닭이 없을 것 같소. 머지않아 이 나라 방방곡곡이 모두 싸움터가 될 터인데, 멀리 간도까지 가서 무엇 하겠소? 여기서 일이 돌아가는 걸 살피다가 죽창이든 도끼든 잡히는 대로 들고 아무 데나 부르는 곳으로 달려가 힘을 보태는 것이 나라를 되찾는 데 더 빠른 방도가 될 것이오."
어느 날 대한매일신보로 갔다가 만난 안창호도 말하였다.
"동지, 아무래도 사태가 심상치 않소. 곧 광무황제께서 퇴위하고 황태자께서 보위를 물려받게 될 것이라 하오. 하지만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새 황제가 동경 황성으로 입조(入朝)하여 천황에게 무릎 꿇고 사죄해야 이번 해아(海牙·헤이그) 밀사사건이 결말날 것이란 소문도 있소. 아무래도 해외로 나가는 일은 잠시 미루어야겠소. 나라 안에 머물며 변화를 살펴 거기에 맞게 대처해 나갑시다."
그래서 며칠 더 머뭇거리는 사이에 사태는 한층 더 급박하게 돌아갔다. 그 해 7월 18일 광무황제는 끝내 이등박문의 밀명을 받은 이완용 내각의 압박을 버텨내지 못하고 황태자로 하여금 국사를 대리케 한다는 조칙을 내렸고, 20일에는 중화전(中和殿)에서 황제양위식이 거행되었다. 양위(讓位)를 반대한 많은 대신들이 면관(免官)되거나 귀양을 가고, 전 중추원(中樞院) 의관 이규응(李奎應)은 이완용 내각을 성토하고 자결하였다.
황제양위식이 있고 나흘 뒤에는 흔히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이라 불리는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이 비밀 부대(附帶)각서와 함께 조인되어 다음날로 공포되었다. 정미칠조약은 외양으로도 대한제국을 보호국에서 식민지로 물아 가는 마무리 단계로 보인다. 대한제국의 주요 국정은 미리 통감(統監)의 지도를 받아야 하고 법령개정이나 중요 행정처분은 통감의 승인을, 대한제국의 고등관리 임면은 통감의 동의를 얻은 다음에야 시행할 수 있었다. 또 통감이 천거하는 일본인을 조선관리로 임명해야 하며, 통감의 동의 없이는 외국인을 함부로 초빙할 수 없었다. 사법사무(司法事務)를 보통의 행정사무와 분리하여 통감부가 장악함으로써 의병이나 항일지사들을 가혹하게 처벌하고 살상할 수 있게 된 것도 정미칠조약 이후였다. 그러나 정미칠조약의 그 모든 독소조항보다 더 무서운 게 비밀 부대각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