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3 때 유학을 떠나 미국 동부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마친 이모(28)씨는 지난해 12월 증권사 입사 시험을 봤다. 그는 "영어 면접 등에서 오히려 역차별을 느꼈다"고 했다.
그는 "영어 면접에 들어갔더니 면접관이 옆에 앉은 국내파 지원자에게는 간단한 자기소개를 시키고 나한테는 불쑥 '미국의 유동성 위기에 대해 설명하라'고 했다"고 말했다.
"옆자리 지원자는 약간 더듬고 발음도 부정확했지만 '그 정도면 잘했다'고 넘어가는 분위기였어요. 저는 그보다 훨씬 잘하는데도 중간에 막히니까 분위기가 싸늘했어요. 그 탓인지 결국 떨어졌지요."
올 들어 중견 기업 영업부에 취직한 이씨는 "일상 대화에서는 아무 어려움이 없지만 외국인 바이어를 설득할 때는 적당한 표현이 생각나지 않아 막힐 때가 있다"며 "어찌 보면 자연스런 일인데도 주위에서 '당연히 네이티브 수준이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식으로 바라봐 솔직히 부담스럽다"고 했다.
'영어를 잘하고 싶다'는 열망은 조기유학 1세대를 움직인 가장 강력한 동력(動力) 중 하나였다. 교양 있는 전문직 네이티브처럼 영어를 구사하는 것이 수많은 부모와 학생의 로망이었다.
영어는 조기유학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성과로 간주돼왔지만, 실제로 조기유학생들이 느끼는 자신의 영어 실력 수준은 한국 기업과 부모가 기대하는 수준과는 달랐다.
본지 특별취재팀이 1994~2000년 한국을 떠난 조기유학 1세대 100명을 인터뷰한 결과, "네이티브 수준(전문지식과 감정표현 등 모든 부분에 걸쳐 세세한 부분까지 이해가 가고 표현도 능숙한 상태)"이라고 자신한 사람은 절반에 불과했다. 나머지 44%는 이씨처럼 "국내파보다는 월등하고 일상생활이나 수업에는 지장이 없지만 네이티브 수준은 아니다"고 했다. "보통 이상이지만 대화 도중 가끔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나온다"는 사람도 6%나 됐다.
본지 조사에 응한 조기유학생들이 유학을 떠난 평균 나이는 15세, 영어권 국가에서 보낸 평균 기간은 8년이었다. 어렸을 때 가서 8년을 살아도 영어는 어렵고, 아무리 능통하게 해도 외국어는 여전히 외국어라는 얘기다.
겸손이라고만 보기는 어려웠다. 취재팀이 국내 기업과 외국계 기업 인사담당자 100명에게 설문한 결과, 조기유학생들의 자평보다 오히려 평가가 혹독했다. "네이티브에 가까운 완벽한 영어 구사 능력에 만족한다"는 응답은 16%에 불과했다. "네이티브 수준은 아니지만 국내파 사원보다는 믿을 만하다"는 평가가 50%, "영어 잘하는 국내파 사원이 많아서 별 차이가 없다"는 이가 25%였다. "기대보다 영어 실력이 떨어져 실망스럽다"는 응답도 9%나 됐다.
조기유학생들은 "주위에서 '살다 왔으니 당연히 네이티브 수준이겠지' 하는 식으로 기대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고 했다. 국내파보다는 분명히 잘하는데도 영어를 하다 막히면 "살다 왔는데 그것밖에 못해? 혹시 놀다 온 것 아니야?" 하는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고1 때 유학을 가 미국 사립고등학교와 사립대학 4년을 마친 오모(29)씨는 귀국 후 치열한 경쟁을 뚫고 모 시중은행에 합격해 3년째 근무하고 있다. 그는 "솔직히 아직도 영어 잘하는 사람이 제일 부럽다"고 했다.
"물론 국내파 동료들과 비교하면 내가 훨씬 잘하죠. 하지만 외국인 고객을 상대할 때나 외국인 대상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할 때면 실수하거나 말이 막힐 것 같아 긴장됩니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에서 자란 이모(여·25)씨는 고등학교 입학 직전 뉴질랜드 사립학교로 조기유학을 떠냈다. 무역회사를 하는 아버지가 "영어를 잘해야 한다"며 적극적으로 권했다.
이씨는 뉴질랜드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뒤 미국 뉴욕주립대에 진학해 회계학을 전공했다. 올 9월부터 캐나다의 한 회계법인에 출근할 예정이다. 가족이나 초등학교 친구들은 영어권에서 9년을 산 이씨를 보고 "영어가 '네이티브'(원어민) 수준"이라고 한다. 그러나 정작 이씨는 자신의 영어 실력을 "일상생활에는 지장이 없지만, 전문 분야에 관해 읽고 쓰거나, 세세한 감정 표현을 할 때 자유롭지 않다"고 자평(自評)했다.
"노력해도 극복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요. 제 또래 미국 친구들이 어렸을 때 본 인기 만화영화 주인공을 빗대서 얘기를 하면 모두 포복절도하는데 저한텐 그저 암호일 뿐이에요. 입사원서나 공식적인 편지를 쓸 때 어떤 표현이 고급스러운지 아닌지는 느낌으로만 알 수 있는 부분인데 아직 잘 모르겠어요."
고1 때 한국을 떠나 미국 사립고등학교를 마치고 명문 공립대학을 졸업한 민모(27)씨는 "밖에서 보기에는 영어와 한국어를 다 잘하는 것 같지만 막상 들여다보면 어느 쪽도 완벽하지는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게 유학생의 딜레마"라고 했다.
이처럼 조기유학생들이 한계를 느끼는 이유는 언어 구사능력에 언어 그 자체에 대한 숙달뿐 아니라 문화와 사회에 대한 이해까지 포함되는 까닭이다. 이런 부담감은 조기유학생 100명 가운데 52명(복수전공 포함)이 상경계열을 전공한 데서도 드러난다.
서울대 아동가족학과 이순형 교수는 "상대적으로 영어를 덜 쓰는 분야, 수학에 강한 한국 학생들이 비교우위를 가지는 분야가 상경계열"이라며 "인문학이나 법학 등은 서양의 문화적 전통에 정통해야 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부담스런 전공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최근 고1 때 시작한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해 취업 준비 중인 이모(29)씨는 열렬한 '미드'(미국 드라마) 팬이었다. 그는 "요즘 미국에 있을 때 봤던 '프리즌 브레이크'를 한글 자막이 들어간 버전으로 다시 본다"고 했다.
"국내 친구들이 '너도 자막이 필요하냐'며 놀라지만 사실 영어를 들으며 한글 자막을 함께 봐야 내용을 100% 이해해요. 드라마에는 미국인들만 쓰는 특유의 숙어와 속어가 많아 완벽하게 알아듣기가 힘들어요. 미국에서 오래 살았어도 '미드'는 여전히 어렵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