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광양시 금호동 해안도로. 섬진강 하구를 지나 남해를 향해 굽이쳐 흐르는 물결이 은빛으로 반짝인다. 물기를 적당히 머금은 바람은 우거진 진초록 잎들을 살랑살랑 흔든다. 아침 8시가 되면 이 왕복 2차로 바닷가 길은 상쾌하게 자전거 페달을 밟는 직장인과 학생들로 가득 찬다. 12일 아침, 길이 4.8㎞의 이 해안도로를 10분 동안 1000대가 넘는 자전거가 달렸다. 푸른색 작업복 차림의 광양제철소 직원들, 흰색 교복을 입은 중·고교생들…. 꽃을 모두 떨어낸 왕벚나무가 흐드러진 잎으로 이들 머리 위에 근사한 녹색터널을 만들어 주었다.

광양의 아침 풍경을 이렇게 바꾸어놓은 '원조'는 학생들이다. 제철소 직원 자녀가 주로 다니는 광양제철중·고교 학생 대부분은 1985년 개교 때부터 등·하교 때 자전거를 탔다. 학교에서 주택단지까지 거리가 2~3㎞에 불과한데다, 자전거 도로 여건이 좋아 학교 측이 등·하교 때는 '걷기' 또는 '자전거 타기'만을 허용하고 있다. 이 학교 재학생 2798명 중 70%가량이 자전거를 이용하고, 나머지는 걷는다. 학교 운동장 주변에는 자전거가 수백대씩 줄지어 세워져 있다.

그러던 것이 이 고장 최대의 산업체인 광양제철소로 열기가 번졌다. 제철소는 올 3월 말 대대적인 자전거 타기 운동을 시작했다.

녹향(綠香) 얹힌 짭조름한 바람에, 빛나는 은륜(銀輪)위 경쾌한 다짐…. 지난 12일 오전 광양제철소 앞 해안도로에서 제철소 직원들과 인근 중·고교학생들이 자전거를 타 고 달리고 있다. 총 4.8㎞ 도로 가운데 1㎞ 구간은 자전거로 출근·등교하는 이들을 위해 평일 오전 7시30분부터 1시간 동안 차량통행이 통제된다.

이산화탄소를 직접 배출하는 철강 산업체로서 자전거 출·퇴근 직원(자출족)을 늘려 조금이라도 환경에 보탬이 되게 하자는 뜻이었다. 그런데 직원들 반응이 폭발했다. 이산화탄소 절감 같은 명분뿐 아니라, 시간과 기름값을 절약하고, 덤으로 건강도 챙기자는 자발적 참여자들이 가세하기 시작했다. 지금 자전거 타기 바람은 생산·영업직 가리지 않고 회사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정현수(59) 광양제철중 교무부장은 "제철소 직원과 학생들 자전거 수를 합하면 1만대가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감을 얻은 회사는 출·퇴근에 쓰이는 개인 차량 8800대를 올해 말까지 6000대로 줄인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리고 오는 2012년 말까지는 출·퇴근 개인 승용차를 모두 없앨 계획이다.

2002년부터 마라톤으로 체력을 관리해온 석금민(55·도금공장)씨는 광양시 광영동 집에서 회사까지 8㎞가량을 자전거로 출퇴근한다. "별도로 시간을 쪼갤 필요 없이 운동을 할 수 있어 좋아요. 자전거를 타면서 MP3플레이어로 영어공부까지 하지요." 김금열(49·생산기술부)씨는 "4월 초부터 예전보다 1시간 30분씩 일찍 일어나 30분간 자전거를 타고 출근한다"며 "하루종일 지탱하는 힘을 '두 바퀴'에서 얻는다"고 했다.

생산기술부 박문수(47) 도전과제프로젝트 리더는 "10년째 자전거로 출퇴근하는데 요즘처럼 출근 자전거를 많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고혈압과 심장질환을 극복하기 위해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는 그는 "자전거는 하체를 단련하고 복부 지방을 줄이는 데 그만이고 성인병 예방에도 좋다"고 말했다.

회사는 이런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화자데이'라는 특별행사를 만들었다. '화자데이'는 '화요일은 자전거 타는 날'이라는 뜻이다. 이날에는 참여 가능한 모든 직원이 승용차를 집에 두고 자전거로 출근한다. 인근 주택단지에서 출발하는 자전거가 2~3m 간격으로 제철소 정문까지 거대한 행렬을 이룬다. 직원들은 주택단지에서 부서별로 모여 함께 출근길에 나선다. 점심에는 회사가 제공한 도시락으로 자전거 간담회도 연다.

박찬훈 행정섭외그룹 팀리더는 "매주 화요일에는 부장 주재로 점심을 함께 나누며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낸다"고 말했다. 회사는 4회 연속 화자데이 참여 직원 205명에게 지난달 제철소 내 백운아트홀에서 열린 김건모 콘서트 티켓을 선물로 주었다.

앞으로는 '자출족 마일리지' 제도도 운영할 계획이다. 자출족 직원에게 각종 문화공연과 휴양시설, 사내 미니골프장을 우선 이용할 수 있는 혜택을 주는 제도다. 자전거 전용 출입문에 부착된 인식기가 자출족 신분증 칩을 읽어 자동으로 우대 포인트를 적립해 주는 방식이다.

회사는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껏 자전거를 몰고 올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이라고 보고, 자전거 거치대 600대분을 추가 설치했다. 기존 것과 합하면 1500대의 자전거를 동시에 세울 수 있다. 위치도 건물 뒤편에서 현관과 가장 가까운 곳으로 옮겼다. 자전거를 위해 건물 복도 일부 자리도 내놓았다. 각 건물 샤워장에는 자출족을 위해 수건과 비누를 비치했다.

자기 승용차 없이도 업무를 충분히 볼 수 있도록 사내 공용차량을 기존 4대에서 6대로 확대했고, 출·퇴근 버스도 대폭 늘릴 계획이다. 이재길 자전거 타기 운동 T/F팀 기획담당은 "자전거가 더욱 늘어나면 기존의 차량용 주차장을 자전거용으로 전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지난 3월 말 100여명이던 자전거 출근 직원은 현재 780여명에 달한다. 차량출입증을 반납한 자출족동호회 '두 바퀴로 여는 세상' 가입 직원도 수십명에서 2개월 만에 310명으로 늘었다. 하지만 광양제철소 전체 임·직원이 6300여명이나 되는 점을 감안하면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이종덕 행정섭외그룹 리더는 "한 사람이 매일 10㎞씩 한 달(20일 근무 기준)을 승용차로 다니면 이를 정화하기 위한 소나무 323그루가 필요하다"며 "자동차 2800대를 감축하면 소나무 90만4400그루를 심는 효과와 같다"고 말했다.

광양제철소는 전남 광양 금호도를 깎아 바다를 메운 땅에서 1987년 가동을 시작했다. 덕분에 전체적으로 언덕이 거의 없는 평평한 지형이 됐고, 자전거 타기에 더없이 좋은 입지 조건을 갖췄다.

5400가구 제철소 직원이 거주하는 금호동 주택단지에서 광양제철소 각 공장 정문까지는 2~3㎞ 거리여서 편도로 10~20분이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