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에 상추밭이 있어 가끔 올라가는데 그때마다 옆 건물로 뛰고 싶어 미치겠다니까요?"
김영민(32·프리랜서 웹디자이너)씨가 자기가 사는 인천시 부평구 4층 빌라를 올려보며 말했다. 빌라 주변에는 3m 간격을 두고 옹기종기 건물들이 붙어 있었다. 그는 "벽을 타고 꼭대기까지 오르는 건 기본"이라며 "4.5m 높이에서도 뛰어내릴 수 있다"고 했다.
김씨는 4m 정도의 담을 맨손으로 넘는 것도 가능하다고 했다. 그에게 "스턴트맨이냐"고 물었다. 그는 '야마카시'를 한다고 했다. 김씨는 회원 5만5000명인 동호회 '야마카시 코리아' 대표다. 극한(extreme) 스포츠의 일종인 야마카시는 아프리카 콩고의 링갈라어(語)로 초인(超人)이라는 뜻이다.
야마카시는 1980년대 프랑스 젊은이들이 장비 없이 맨 몸으로 건물을 타고 논 데서 비롯됐다. 프랑스어 '길(parcour)'에서 파생된 '파쿠르(parkour)'가 정식 명칭이다. '프리러닝(free running)'이라고도 한다. 야마카시는 파쿠르를 하는 유명한 팀 이름으로 고유명사로도 쓰인다.
우리나라는 2003년 '야마카시 코리아'가 시초다. 지난 4월 개봉한 '13구역: 얼티메이텀'이 야마카시를 소재로 한 대표적 영화다. "인터넷에서 외국 동영상을 처음 본 뒤 넋이 빠져 가만히 있었어요. 저도 모르게 '저거구나, 도대체 저걸 하는 사람들은 누굴까?' 필(feel)이 꽂혔죠."
김씨는 "난간에 매달린 채 벽을 차고 텀블링을 하며 지형·지물을 창조적으로 넘는 모든 행위가 야마카시"라고 했다. 컴퓨터 그래픽 없는 '맨몸 액션'이다. 홍콩 배우 청룽(成龍·성룡)의 몸짓이 대표적 예다. 김씨는 "도망을 쳐도 냅다 달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 '간지('폼난다'는 속어)'나게 뛰는 것"이라고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합기도와 검도, 격투기로 단련된 김씨는 야마카시의 숨막히는 액션에 매료됐다. 기계체조와 암벽등반도 배웠다. 그는 "뛰어내리거나 매달리기 좋은 건물을 찾으려 한동안 하늘만 쳐다보고 걸었다"며 "벤치가 나오면 한 바퀴 몸을 돌려 뛰어넘고 담이 있으면 막 바로 타고 넘었다"고 했다.
담장 위의 김씨를 본 놀란 경비가 "다 큰 사람이 뭐 하는 짓이냐"며 제지하기 일쑤였다. 공원과 대학 캠퍼스가 주무대다. 빌딩 사이를 건너뛰는 것은 국내에서는 아직 쉽지 않다. 그는 "주로 잡지나 화보 촬영 때 평소 뛰어 보고 싶던 장소를 섭외토록 제작진에 귀띔한다"고 했다.
그는 성취감이 가장 큰 매력이라고 했다. "못 풀던 수학문제도 끙끙거려 풀고 나면 뿌듯하잖아요.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해볼까' 고민 끝에 장애물을 헤쳐가면 '해냈다'는 기분으로 정말 짜릿하죠."
위험할 것 같다는 물음에는 "감당할 수 없는 높이에서는 아무리 뛰려 해도 몸이 거부한다"며 "거리와 높이를 차근차근 늘려가는 것이지 객기로 야마카시를 하면 위험할 수 있다"고 했다. 뛸 수 있는 거리를 보폭으로 대부분 알고 있기 때문에 무작정 몸을 던지는 무식한 운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야마카시 관련 뮤지컬을 하면서 세트가 잘못돼 갈비뼈가 부러진 적은 있다"며 "뻔히 봐도 다칠 만한 상황에서 누가 개념 없이 몸을 던지겠느냐"고 했다. 다만 움직임이 둔해지기 때문에 특별한 안전 도구를 착용하지 않는 만큼 스스로가 각별한 주의를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실제 지난 2007년 수원의 한 고등학생이 아파트 난간에 매달려 있다가 추락사 했을 때 야마카시를 하다 떨어졌다는 보도가 있었다. 야마카시 때문이 아니라는 경찰의 공식 해명이 있었지만 이미 사건은 일파만파로 커진 뒤였다. 김씨는 "자기 몸을 조절할 수 있고 이성적으로 판단 할 수 있는 14~15세 이상이 야마카시를 하기에 적당한 나이라고 본다"고 했다.
야마카시 동호회는 전국 16개 지부를 두고 정기 모임을 갖는다. 1년에 두 번 기술 연습을 하기 위해 30여명의 전국 고수들이 모여 '리더 세미나'도 한다. 김씨는 "합숙 때는 다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꿈을 꾸는지 비명을 지르거나 다리를 절뚝거리는 등 잠꼬대들이 심하다"고 했다.
작년부터 경기도 부천의 한 고등학교에서는 특별활동 시간에 야마카시를 하고 있다. 올 2학기부터 야마카시를 하겠다는 학교가 몇 곳 더 생겨 교육일정을 협의하고 있다. 지인의 소개로 6년 전 만난 아내 안시내(26)씨도 아예 야마카시 영상을 만들고 동호회원을 관리하는 일에 팔을 걷어붙였다.
안씨는 "첫 만남 때 '이상한 것'을 한다면서 사진을 보여주기에 관심이 생겼던 것 같다"며 "암벽등반도 덩달아 같이 배웠다"고 했다. 김씨는 1년의 집필기간을 거쳐 지난달 국내 최초로 야마카시 교본서도 펴냈다. 80년대 '페르시아의 왕자'시리즈부터 최근의 '프리러닝''미러스 엣지'까지 야마카시를 응용한 게임도 많다.
김씨는 "캐릭터의 몸짓을 더욱 자연스럽게 만들기 원하는 게임회사에 조언을 해준 적도 많다"고 했다. 이미 외국에서는 야마카시 고수들의 몸에 센서를 달고 움직임을 디지털화하는 '모션 캡처'가 활발하다는 것이다.
격투 신과 추격 신에서 야마카시의 움직임을 응용하려는 영화, 드라마가 늘어나는 것도 김씨가 바빠지는 이유 중 하나다. 김씨는 "자동차의 역동성을 표현하기 위해 신차 발표회나 모터쇼 때 특히 퍼포먼스 문의가 많다"고 했다. 현재 김씨는 인터넷 방송에서 야마카시 전문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도둑이 야마카시를 배우면 어떻게 될까? 김씨는 "회원들끼리도 그런 이야기를 가끔씩 한다"며 "옥상에 올라가면 길이 훤히 보이고 그림이 그려진다. 신창원 같은 탈주범이 야마카시를 한다면 경찰이 못 잡는 것도 당연하다"고 했다.
"가끔 절도범의 인상착의를 말하면서 아는 인물이냐고 물어오는 형사들이 있어요. 용의자가 혹시 야마카시를 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겠죠. 한 특수부대에서는 부대원들에게 야마카시를 지도해 달라고 하더군요. 시가전에서 건물에 진입할 때 유용하다는 거죠."
야마카시가 악용돼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경찰이나 소방서 조직과 하루 빨리 연계됐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실제 지난 2006년 개봉해 야마카시를 널리 알린 '13구역'의 두 주인공도 죄수와 경찰이다. 김씨가 야마카시 전문 학원을 준비 중인 것도 그 때문이다.
김씨는 현재 프리랜서로 하고 있는 웹 디자인을 제외하면 뚜렷한 수입이 없다. 당분간은 '부채 생활'을 계속 해야 할 처지다. 처가에서도 '독특한 사위' 때문에 반대가 심하다고 했다. 김씨는 "야마카시도 하나의 문화가 될 수 있다"며 "이게 내 직업"이라고 했다.